“(자사 제품이) 경쟁사보단 훨씬 낮은 가격으로 판매될 것이다.”
일종의 선전포고다. 경쟁 업체 실명은 빠졌지만 도전장 주체를 감안하면 누구나 쉽게 예측 가능하단 측면에선 양측의 흥미진진한 진검승부도 점쳐진다. ‘왕년의 반도체 제왕’으로 유명한 인텔이 지난 4일 대만에서 정보기술(IT) 전시회로 열렸던 ‘컴퓨텍스 2024’ 행사에 참가, 대내외에 천명한 전투적인 행보다. 이날 자사의 신형 인공지능(AI) 반도체 칩인 ‘가우디3’의 이례적인 가격 공개와 더불어 구사된 공격적인 견제구였음을 감안하면 상대는 요즘 생성형 AI 시장의 ‘뜨거운 감자’인 엔비디아로 좁혀졌다. 인텔은 이날 자사 ‘가우디3’와 엔비디아 제품의 세부 성능까지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화력을 집중시켰다.
생성형 AI 반도체 시장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과거, 컴퓨터(PC) 반도체 분야에선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인텔이 생성형 AI 시장 경쟁에 참전, 이곳의 신흥강자로 자리매김한 엔비디아와 한판승부가 예고되면서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꺾였던 PC시장에만 안주, 대세로 전환된 모바일 시장의 적기 대응에 실패하면서 여전히 몰락한 공룡기업으로 낙인찍힌 인텔 입장에선 생성형 AI 반도체 공략에 사활을 걸고 나선 분위기다. 인텔은 심지어 “엔비디아의 독점적 지위에 맞서겠다”며 공공연하게 반(反)엔비디아 세력 전선 구축까지 돌입한 상태다.
엔비디아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고수했던 신제품 출시 주기까지 앞당기면서 AI 반도체 ‘넘버1’ 자리의 수성 전략에 착수한 상황. 앞선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후발주자와 격차도 확실하게 벌려놓겠다는 심산에서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 학습과 추론엔 필수적인 대용량 데이터 병렬 처리 방식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약 80% 점유율을 차지, 사실상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텔의 공세는 매섭게 전개되고 있다. 선봉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내세웠다. 인텔은 ‘컴퓨텍스’ 행사에서 “지난달 공개한 ‘가우디3’가 경쟁사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델과 대만 전자업체인 인벤텍 등을 포함한 파트너들에게 판매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텔은 앞서 ‘가우디3’이 엔비디아의 최신 칩 H100 그래픽처리장치(GPU)보다 2배 이상의 전력 효율에, AI 모델을 1.5배 더 빠르게 실행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GPU는 한 번에 데이터 대량 처리가 가능한 병렬 처리 방식의 반도체로 현재 AI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인텔은 특히 AI 칩 8개가 포함된 가우디3 가속기 키트가 약 12만5,000달러(1억7,000만 원)에 판매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전 버전인 ‘가우디2’ 가격은 절반 수준인 6만5,000달러(약 9,000만 원)에 책정했다. 커스텀 서버 공급업체인 싱크메이트에 따르면 8개의 엔비디아 H100 AI 칩을 장착, 유사한 수준의 HGX 서버 시스템은 30만 달러(약 4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우호 세력 구축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인텔은 자체 생산 라인을 확보하고 있지만 가우디 생산에 대해선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에 맡기면서다. 업계 안팎에선 경쟁사인 엔비디아 견제를 위한 전략적 행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뇌부도 신경전에 가세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AI 반도체 주도권 다툼과 관련, “인텔 제품과 같은 기존 프로세서가 AI 시대엔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주장에 적극 반박하고 나섰다. 겔싱어 CEO는 “인텔이 PC 칩의 선도적 공급업체로서 AI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여러분을 믿게 하려는 젠슨의 의도와는 달리 무어의 법칙은 여전히 살아 있고 건재하다”고 맞받았다. ‘무어의 법칙’이란 인텔의 공동 설립자인 고든 무어의 진단에 기반한 예언으로, 반도체 집적회로의 밀집도가 18개월마다 배로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겔싱어 CEO는 이어 "나는 이 상황을 25년 전의 인터넷과 같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이것에 대해 반도체 산업을 10년 안에 1조 달러(1,377조 원) 규모로 이끌 연료로 보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AI 반도체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한 엔비디아는 인텔보단 먼저 선공을 가했다. 엔비디아는 ‘컴퓨텍스 2024’ 행사 기간인 지난 4일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인 ‘루빈’을 깜짝 선보였다. 지난 3월, 신규 GPU 플랫폼인 ‘블랙웰’을 공개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또다시 꺼내 든 야심작 카드로 주목됐다. 블랙웰 출시 이전부터 차세대 제품 계획까지 내비치면서 세계 AI 반도체 시장에서 거머쥔 기술적인 리더십을 놓치지 않겠단 복안으로 풀이된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제품 출시 주기를 기존 2년에서 1년으로 단축기로 정한 엔비디아의 내부 방침도 같은 맥락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 행사 기조연설을 통해 GPU 기술 로드맵 설명과 함께 루빈의 구체적인 출시 시점까지 2026년으로 제시했다. 엔비디아에선 루빈에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8개, 2027년에 선보일 ‘루빈 울트라’엔 12개씩 각각 탑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엔비디아의 이런 행보에 대한 외부 평가도 긍정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젠슨 황 CEO의 발표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지속적인 우위를 이끌면서 AMD나 다른 경쟁사가 단기간에 흔들기 어려워 보인다"고 진단했다.
시장 반응도 민감했다. 5일 뉴욕 증시에서 엔비디아 주가는 전날보다 5.16% 급등한 1,224.40달러(약 168만 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달 23일 1,000달러를 돌파한 이후, 25%가량의 수직 상승세만 고수하고 있다. 덕분에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3조110억 달러까지 불어나면서 꿈의 ‘3조 달러’대에 진입했다. 시총 3조 달러 진입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이어 3번째다. 이날 종가 기준으론 약 6개월 만에 시총 3조 달러를 회복한 애플마저 제치고 시총 2위에 마크됐다. 시총 1위인 MS(3조1,510억 달러)와 격차도 1,400억 달러까지 좁혔다. 시장에선 ‘루빈’에 대한 향후 청사진이 엔비디아의 시총을 견인하고 있단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편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프레시던스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218억 달러(한화 약 29조9,300억 원)에 머물렀던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32년엔 2,274억 달러(약 312조2,000억 원)로 급성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