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남성이 누구 탓입니까. '나의 적은 나 자신'이란 것을 알아야 '치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최근 일본 틱톡, 엑스(X)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약자 남성', '치규'란 말을 종종 볼 수 있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약자 남성의 특징', '라인(LINE)에서 치규 감별하는 법' 등 인기 없는 남성을 조롱하는 듯한 게시물이 그것이다.
치규는 '치즈 규동(쇠고기덮밥)'의 줄임말로, '쇠고기덮밥에 치즈를 얹어 먹을 것 같은 남자', 즉 누구에게도 인기 없는 남자를 뜻하는 표현이다. '약자 남성'과 함께 자주 쓰인다. 남성의 자기계발에 대한 동영상을 올리는 일본인 인플루언서 '조지 멘즈코치'는 자신의 SNS 계정에 "치규로 머무를 텐가. 자기 스스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상을 게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약자 남성이라는 표현은 요즘 생겨난 신조어는 아니다. 약자 남성은 보통 '저학력, 단신, 저소득 남성들이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미 2010년대, 그 이전부터 온라인 상에서 많이 쓰였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일본 젊은층의 시선을 끈 것은 약자 남성을 주제로 한 책 '약자 남성 1,500만 명 시대'가 인기를 끌면서다.
지난 4월 24일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본 아마존 인기 도서 상위에 이름을 올리며 주목받았다. 도쿄 시내 서점에서도 눈에 띄는 곳에 배치돼 있다. 책 띠지에는 불쌍한 일본 남자를 지칭하는 문구를 잔뜩 담았다. '빈곤, 커뮤니케이션 장애, 독신, 발달장애 등 이 나라는 약한 남자를 구해주지 않는다', '미혼남성 행복도는 선진국 최하위', '남성 자살률은 여성의 2배' 등을 강조한다. 일본 남성은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불쌍한 존재라고 강조한다. 저자 토이안나는 일본 남성의 24%, 4명 중 1명이 약자 남성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여러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약한 남자들끼리 뭉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비영리단체(NPO) '일본약자남성센터'다. '남녀평등 사회 실현'을 내걸고 2022년 7월 출범한 이 단체는 지난해 10월 도쿄도 NPO 법인으로 인증도 받았다.
이 단체는 남자들만을 위한 독특한 이벤트를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국제 남성의 날(매년 11월 19일) 하루 전인 11월 18일 도쿄 시내 한 노선의 트램을 빌려 트램 외부에 '남성 전용 차량'이라는 표식을 붙여 운행하게 했다. 승객이 붐비는 출근 시간대 여성 탑승객의 성추행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든 '여성 전용 차량'을 따라 한 것이다. '여자만 성추행당하냐. 남자도 위험하다'고 항변하기 위해, 하루지만 돈을 들여 설치했다. 도쿄도가 지난해 8월 2,21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철 안이나 역 구내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 있다고 밝힌 비율은 여성이 41.1%, 남성이 7.8%였다.
이 센터는 2022년부터 국제 남성의 날과 아버지의 날(매년 6월 세 번째 일요일)에 같은 이벤트를 진행해 왔는데, 그때마다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한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피해를 당하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약자 남성은 우리 스스로 돌봐야 한다'며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올해도 오는 23일 하루 트램을 빌려 특정 시간 네 번째 남성 전용 차량을 운행하기 위해 이벤트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올해 다시 약자 남성론이 화제가 된 것은 단지 책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에서 최근 남녀 간 편 가르기를 부추기는 각종 사건, 사고가 연이어 일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4월 22일 '받는 여자 리리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와타나베 마이(25)는 연애를 하고 싶은 중년 남성의 심리를 악용해 3명의 남성으로부터 1억5,500만 엔(약 13억6,0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와타나베는 어떻게 하면 중년 남성을 홀려 돈을 뺏을 수 있는지, 자신만의 사기 수법을 정리한 90여 쪽의 매뉴얼을 SNS에 공개하고 판매해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SNS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고독한 약자 남성들을 이용한 성매매나 다름없다"며 피해자인 남성의 편을 드는 쪽과 "아저씨와 사귀고 싶은 젊은 여자가 어디 있겠나. 속은 남자가 한심하다"며 사기에 휘말린 남성을 비난하는 편으로 갈려 논쟁이 벌어졌다.
남녀 양쪽으로 나뉘어 상대의 성별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싸움이 벌어진 셈이다. 문예평론가로 활동하는 후지타 나오야는 일본 아사히신문에 이러한 논쟁과 관련해 "이번 논쟁은 유사 연애 문제와 남성의 고독감을 사회적으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며 "불필요한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는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후지타의 지적대로 일본 사회에서 약자 남성론은 일부 남성을 조롱하는 남성 혐오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 설 곳이 없다'고 외치며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백래시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권리 신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지자 오히려 '남성이 피해를 받는다'라는 반론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약자 남성론이 특히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 힘을 받는 이유는 쇼와시대 남성의 권위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쇼와시대는 1970년대 버블경제로 불렸던 일본의 고도성장기로, 남성이 경제 활동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 여성은 집에서 가사를 전담하는 성별 분업이 뚜렷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린 경기 침체기가 길어지자 일본의 상징인 '종신고용'이 붕괴하고 비정규직이 갈수록 증가하기 시작했다. 쇼와시대 때 경제권을 쥐었던 남성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의미다.
반면 같은 시기 여성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고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졌다. '남성=종신고용 정사원, 여성=전업주부'라는 고정관념이 강한 일본 사회였지만, 변화의 흐름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토 마사아키 세이케이대학 현대사회학과 교수는 "약자 남성론의 근본적인 발단은 경제 문제로, 정규직 남성들이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로 밀려나면서 경제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라며 "여성 인권의 확대에 대한 반발 심리로 생긴 반(反)페미니즘과 겹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약자 남성론은 남성의 경제적 지위가 흔들릴 때마다 확산해 왔다. 약자 남성이라는 표현이 처음 일본 사회에서 이슈가 됐던 것은 2010년대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불린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갑자기 실업자 신세가 된 남성이 많아진 시기다. 최근에 약자 남성론이 다시 이슈가 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엔화 약세, 물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10년대 약자 남성론은 리먼 사태로 재취업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시기로, 남성 간 경쟁에서 밀려난 남자들 중심으로 제기됐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코로나 사태 이후 비정규직의 처우가 나빠지고, 엔저(엔화 약세)로 인해 수출 중심 대기업 직장인들은 벌이가 좋아진 반면 물가 상승으로 중소기업·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살림살이는 나빠지면서 격차가 커지자 다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약자 남성론이 '약자 경쟁'을 부추겨 진정한 약자가 소외되는 문제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누가 더 불쌍한가'라는 소모적인 싸움만 벌어져 문제 해결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토 교수는 "여성이 받는 사회적 차별을 '남성도 차별받는다'며 부정하는 대신, 경제·사회의 변화에 따라 복지 체계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살피고 이들을 위한 새로운 복지책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