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서부전선 이상 없겠나

입력
2024.06.06 18:50
26면
사령관부터 비겁 없는 면모로 명예 지켜야
수사받는 지휘관, 위기 시 用兵 문제없나
비정상 방치 국방부, '의혹 덮기' 먼저인가

서북도서와 서부전선은 ‘한반도의 화약고’다. 북한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아 언제든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오물 풍선과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로 완충 공간이 사라지면서 화약고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은 0.001mm라도 침범하면 전쟁도발로 간주한다는 덫까지 놓은 상태다. ‘서부전선 괜찮겠나’ 하는 걱정이 생긴 건 이 때문만이 아니다. 화약고를 지키는 해병대 내부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채 상병 사망사건 외압 의혹의 한가운데 있는 데다, 사령관과 참모들은 공수처에 불려 다니며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다.

서해충돌이 다시 발생하면 천안함·연평도 사태 때와는 양상이 다를 수 있다. 남북은 해당지역 군 편제를 육해공군이 합동대응하는 작전으로 개편했다. 충돌 강도가 그만큼 높아질 것인데, 우리 작전 책임자는 서북도서방위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해병대 사령관이다. 그런데 5월 서북도서방어훈련 기간에 김계환 사령관은 공수처에 불려 가 14시간 조사를 받았다. 위험천만한 군사정세에서 실시된 훈련에 사령관이 없다는 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육군, 공군과 협력 훈련은 난도가 높고 고도의 전문성까지 필요하다. 예하 부대와 장병들은 엄정한 태세를 유지해 양병(良兵)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휘부가 훈련에 빠지고 흔들린다면 위기상황에서 용병(用兵)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채 상병 사건의 진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와 박정훈 대령의 ‘항명’ 사이에 있다. 진실을 알고 있을 해병대 지휘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매일 대면해 일하는 사령관과 참모들이 대통령 ‘격노’에 대해 공수처에서 서로 다른 진술까지 했다. 누군가는 거짓말하는 지휘부라면 임무와 역할에 틈이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군의 비정상을 알고도 방치하는 건 무책임을 떠나 안보 허점을 노출하는 것이다. 전임 해병대 장성이 국방부에 해병대 지휘부의 정상화를 공개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김 사령관이 물러나고 후배가 승진하면 문제의 임성근 소장까지 예편하게 된다. 핵심 연루자들이 군복을 벗고 조사받으면 새 지휘부는 서해 방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사의 표명을 한 김 사령관을 임기 1년이 남아 있다며 굳이 유임시켰다. 다른 장성 인사에 이런 기준이 적용된 것도 아니다. 명예를 살리고 피해를 줄일 방안을 알면서 외면한다면 '의혹 덮기용'이란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국방부는 보수정부가 해병대와 싸우는가라는 해병 전우의 하소연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실이 무엇인지 해병대 지휘부가 스스로 밝히는 게 옳다. 사령관부터 지위에 비겁하지 않은 면모를 보여 명예를 지켜야 한다. 해병대의 특별함은 이등병에서부터 사령관까지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몸이란 데 있다. 그래서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외친다. 전도봉 전 사령관은 정치 권력에 휘둘리고 강자에게 굴복해 정체성을 잃는다면 진정한 해병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군의 신뢰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4·19 직후였다. 권력에 눈이 먼 경찰과 달리 군은 정권 편에 서지 않았고, 발포하지 않았다. 그런 뒤 계엄사령관은 스스로 물러나 책임을 졌다. 군이 정치를 압도한 시대가 지나가자 정치 권력은 군을 이용하려 했다. 인사에 휘둘린 군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뚝심도 고집도 없는 착한 군대가 명예를 가질 순 없다. 해병대가 자정능력을 보여주지 않다간 세월호 참사 때 해경 신세가 될까 우려스럽다.


이태규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