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도발과 그림자 전쟁… 대한민국 흔드는 北 오물 풍선[문지방]

입력
2024.06.09 13:00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8일 오후 11시 북한이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오물 풍선을 띄웠습니다. 북한은 지난달 28, 29일과 이달 1, 2일에 총 1,000여 개의 오물 풍선을 보낸 뒤 "널려진 휴지장들을 주워 담는 노릇이 얼마나 기분이 더럽고 많은 공력이 소비되는지 충분한 체험을 시켰다"면서 "우리의 행동은 철저히 대응조치"라며 오물 풍선 살포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즉 한국이 보낸 대북 전단에 대한 대응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다만, 대북전단 살포를 재개하면 백 배로 갚을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습니다. 8일 띄워 올린 오물 풍선은 6일과 7일 한국 민간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보내자, 경고했던 대로 '백배 보복'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네가 한 대 때리면 난 두 대 때리겠다'는 어린아이들의 신경전 같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대응일 뿐'이라는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링 위의 격투가들조차 한 번의 공격을 위해 수차례의 속임수를 쓰는데, 기만 전술의 달인인 북한에 정직함을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심야에 위성을 기습발사해 허를 찌르고, 천안함 피격 때처럼 몰래 도발한 뒤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는 게 북한입니다.

"북한의 의도를 예단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와 군의 단골 멘트처럼, 북한의 행동에 노림수가 담겨 있을 가능성은 농후합니다. 북한은 지난달 말에서 이달 초 오물 풍선을 살포하면서 서북도서 일대를 향해 위성항법장치(GPS) 교란 공격을 병행했습니다. 특히 지난달 30일에는 600㎜ 초대형방사포(KN-25) 18발을 동시에 쏘아 올리며 "선제공격"을 거론하기도 했죠. 동시에 벌어진 오물 풍선 부양과 GPS 교란, 그리고 단거리미사일 발사. 저는 8개월 전 벌어진 중동의 참상이 떠올랐습니다.


"북한은 하마스식 전술을 활용한 기습 공격, 민수용 장비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한 감시체계 회피, 발달된 국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심리전으로 혼란을 유도하며 공포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침공한 지 사흘 만에 열린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강신철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은 '이스라엘-하마스전 교훈 및 대응방안'에 대해 보고하며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당시 하마스는 로켓 수천 발을 단시간 내에 집중 발사해 이스라엘의 첨단 방공체계인 '아이언돔'에 균열을 냈고, 이와 동시에 패러글라이딩과 고속상륙정 등을 이용한 공중·해상·지상 침투 작전을 펼쳐 이스라엘 접경 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군 역시 "하마스의 기습은 성공했고, 단시간 내 수천 발의 로켓포 공격에 아이언돔의 방어 효과는 미미했다"고 평가했습니다.

1,000여 개의 오물 풍선이 패러글라이딩이었다면, 북한의 초대형 방사포 수십 발이 우리 영토를 겨눈 것이라면, GPS 교란이 우리 군의 레이더를 교란하는 전자기파였다면 어땠을까요? 이른바 다양한 수단을 복합적으로 퍼붓는 '하이브리드 도발'에 우리의 대공 방어망은 아이언돔보다 견고하게 한반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북한의 오물 풍선을 단지 더럽고 치졸한 복수극으로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는 얘깁니다.

전문가들의 생각은 어떨까요?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풍선 같은 비행 기구, 대규모 무인기,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여기에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북한은 최근 다양한 고도, 항적, 속도를 가진 공중 도발 수단을 시험하고 있다"며 "여기에 우크라이나전에서 과시한 러시아의 전자기전 기술까지 더해진다면 우리 방공망은 과부하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선진국들은 방공망의 경우 육해공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는 추세입니다. 통합공중미사일방어(IAMD)는 슈퍼컴퓨터가 감시·정찰 정보를 취합해 최적의 방공 부대에 임무를 하달하는 식입니다. 선진국의 슈퍼컴퓨터와 비교한 우리 군의 분석 능력, 전자기전을 동원한 적의 방해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저고도는 육군이, 고고도는 공군이 담당하고 있는 우리의 방공체계는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북한은 그 경계를 집요하게 노려 육군과 공군이 관할을 두고 다투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변재권 국군방첩사령부 국방보안연구소 연구원 중령(진)은 국방일보 기고문에서 "북한의 장사정포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란의 공습과는 차원이 다르고, 중국의 랴오둥·산둥·지린 일대에도 한반도를 겨냥한 탄도미사일 부대가 있다"며 "몸통(한국형 3축 체계), 눈(군사정찰위성), 머리(전략사령부)가 완성되고 있는 만큼 중추신경(지휘통제체계·C4I)의 발전을 도모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북한과 한반도에서 시야를 넓혀 '신냉전 시대'로 판을 키워서 생각해볼까요? 다소 급진적일 순 있겠지만, 최근 북한의 '회색지대 도발'은 러시아·중국과 나름의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북중러 연대가 큰 위험이 따르는 물리전 대신 '그림자 전쟁'을 통해 상대를 잠식해 나가는 방식을 택했고, 오물 풍선·GPS 교란도 같은 맥락에서 실시된 것이란 주장입니다. 그림자 전쟁이란 공식적인 전쟁 대신 자국의 개입 사실을 숨긴 채 상대국의 중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핵심 인물을 암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엔 사이버 공격, 심리전, 무인기 공격 등의 방식도 포함됩니다.

실제로 유럽에선 러시아가 배후로 의심되는 각종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 영국의 창고, 폴란드의 페인트 공장, 라트비아의 주택, 리투아니아의 이케아 매장 등 광범위한 장소를 대상으로 방화 또는 방화 시도가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련의 사태에 러시아 군사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이 개입돼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사보타주(파괴공작) 전술입니다. 한 군사 전문가는 "영국의 F-35 전투기 부품 생산 공장이 파괴되기도 했고, 독일에선 파이프라인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대만을 상대로 한 중국의 '그림자 전쟁'도 한창이라는 분석입니다. 최근 미국기업연구소(AEI)와 전쟁연구소(SW)가 공개한 보고서 '강압에서 항복으로'에 따르면, 중국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만 스스로 분리주의에 반대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캠페인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정보전, 경제전, 사이버전은 물론 사보타주, 선박 통제, 항공 및 해상 봉쇄, 전자전, 프로파간다(선동) 등을 총동원해 대만의 민생과 행정을 어지럽히고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북한의 숱한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잇단 오물 풍선 앞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도 9·19 군사합의 전면 효력 정지 결정과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남남갈등과 여론 분열. 북한이 '하이브리드 도발' 실험과 함께 '그림자 전쟁'의 일환으로 오물 풍선을 띄운 것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체제 유지가 지상 과제인 북한이 설마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짓을 하겠어?"라는 생각, 현재로선 '만고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건강 상태, 후계구도 조기 구축, 신냉전 구도 속 북중러 연대 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이런 생각은 '천추의 한'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군대는 1% 미만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김경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