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니까요"

입력
2024.06.10 04:30
23면
일론 스펙트(Ilon Specht, 1943.4.19~ 2024..4.20)

광고-홍보를 은유하는 말들은 무척 많고 화려하지만, 지난 세기의 걸출한 광고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즈만큼 투명하게 야심을 드러낸 이도 드물다. 그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요소”이며 “그 사회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정부의 행정부”라 말했다. 광고를 오락이나 예술이 아닌 정보의 한 형태라고 건조하게 정의한 바 있는 전설적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도 다른 자리에선 “팔지 못하면 딴 일자리를 알아보라(We sell, or els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5초 예술’이란 말처럼 광고는 실재나 실체보다 이미지를 부각하고 (정보의) 진술이 아닌 (감각적) 상징으로 승부를 거는 미디어다. 성공적인 광고는, 과장하자면 마법의 주문 혹은 최면처럼 소비자의 뇌를 재프로그래밍해 어떤 것을 지고의 아름다움 또는 영원한 진실처럼 여기게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광고-홍보-선전은 태생적으로 개인-집단의 주체성이나 비판의식과는 썩 어울릴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그 가공할 위력 때문에, 잘 된 광고를 넘어 좋은 광고로 평가받는 작품에는 사회적 책임의식과 윤리적 고민이 스며있다.

1953년 미국 TWA(Trans World Airlines)의 광고가 그런 예다. 국제선 여객기 계단을 내려서는 당당한 미소의 여성 승객들 사진과 함께 광고 핵심 문구 즉 태그라인(tagline)에 “누가 ‘남자들의 세상’이라 말하는가”라는 글이 달렸다. 대서양 횡단 상업비행이 갓 시작돼(1946) TWA가 팬암사와 경쟁하던 때였다. 좋은 광고는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기도 한다.

2차대전 전후부터 베트남전쟁 전까지 미국 사회는 정치적 안정(냉전)과 경제적 번영 덕에 소비의 황금기를 누렸다. 백인 중산층은 자동차와 세탁기, TV, 음식물쓰레기처리기를 경쟁적으로 사들였고, 그 소비 문화를 이끈 건 물론 광고였다.
60년 미국 패션 브랜드 반호이젠(Van Heusen)의 남성용 넥타이 광고는, 53년의 TWA 광고를 대놓고 겨냥했다. 주부인 듯한 여성이 침대에 기대앉은 남편에게 무릎 꿇고 다과 쟁반을 바치는(?) 그림. “세상이 남자의 것임을 그녀에게 보여주라”는 태그라인 아래 작은 폰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남자의 세상을 보여주는 힘찬 패턴의 신상품(…), 이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전시 공장과 사회에 진출했던 ‘리벳공 로지’들이 전후 직장에서 쫓겨나 가정으로 복귀한 뒤였고 경제 호황으로 ‘가장’들의 위세가 드높던 시절이었다.

이어진 70년대는 반전-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격동기였다. 각자 시계를 찬 손을 맞잡은 남녀의 사진 위에 “동일 임금 동일 시간(Equal Pay Equal Time)”이란 문구를 새긴 시계회사 부로바(Bulova)의 72년 광고는 당시 이슈였던 ‘평등권 수정법안(ERA)’에 대한 응원이었다. 여성 전화 설치기사가 전봇대에 매달려 작업하는 사진을 쓴 AT&T사의 72년 광고도 있었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다국적 화장품회사 로레알(L’oreal)사의 저 유명한 광고 태그라인 “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니까(Because, I’m Worth It)”는 한 해 전인 71년 세상에 나왔다.
로레알사 신제품 염색약 ‘프레퍼런스(Preference)’의 광고를 맡은 뉴욕의 한 광고회사(McCann-Erickson) 회의실. 남자 직원들의 고리타분한 아이디어에 질려 버린, 회의실의 유일한 여성이던 20대 신입 카피라이터가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I just thought ‘F*** You) 사적인 감정까지 담아 단 5분 만에” 썼다는 카피. 논란 끝에 채택된 그의 카피는 70년대 페미니즘 ‘전장의 함성(battle cry)’처럼 울려퍼지며 단숨에 경쟁사 제품을 압도했고, 이후 전 세계 약 40개 언어로 시대-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로레알 본사는 97년 회사의 공식 사명(mission)으로 저 카피를 채택했다.
여성 염색약조차 남성 모델이 선전해야 잘 팔린다고 여기던 광고업계의 타성을 깨고 주체로서의 여성을 세상에 선뵌 카피라이터 일론 스펙트(Ilon Specht, 1943.4.19~2024.4.20)가 별세했다. 향년 81세.

모발 염색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코러스걸이나 매춘부들이 하는 일탈”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했다. 그 통념에 은근히 도전한 게 로레알사의 경쟁업체 클레어롤(Clairol)사였고, 선봉장이 또 한 명의 전설적 여성 카피라이터 셜리 폴리코프(Shirley Polykoff, 1908~1998)였다.
클레어롤사는 기존 제품들보다 덜 번거롭고 독성이 적은 염색약을 49년 출시한 데 이어 헤어살롱 전문가가 아니라 아무나 집에서도 모발을 염색할 수 있는 가정용 제품(‘Nice’n Easy’)을 56년 출시, 염색약 원조 기업 로레알의 위세를 일거에 잠재웠다. 광고를 맡은 ‘푸트 콘 앤드 벨딩(현 FCB)’사 여성 카피라이터 폴리코프가 뽑은 태그라인은 “그녀는 (염색을) 한 걸까 안 한 걸까(Does She or Doesn’t She)?”였다.

유대계 뉴요커인 폴리코프는 10대 시절부터 보수적인 부모 뜻을 거스르며 갈색 머리카락을 금발로 물들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30년대 어느 해 유대인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당시 연인이던 훗날의 남편(George Halperin) 집에 인사를 하러 갔다. 펜실베이니아 정통 랍비 집안이었다. 귀갓길에 남자는 폴리코프에게 “어머니 말씀이 당신 머리 염색한 거래. 정말이야?”라고 물었고, 폴리코프는 치부를 들킨 듯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젊은 날의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듯 저 카피를 썼을 것이다.
염색약 발색이 그만큼 자연스러우니 용기를 내 시도해보라는 그의 카피가 “너무 유혹적”이어서 ‘Life’ 같은 잡지조차 초기엔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웃라이어’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1999년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의 광고는 당시 여성들에게 사회적 억압에 맞서, 혹은 우회해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수단 하나를 제공한 셈이었다. 어쨌건 미국의 염색 인구는 50년대 말 7%에서 70년대 40%를 넘어섰다. 베티 프리댄(Betty Friedan)도 '여성의 신비'를 출간하기 한 해 전인 62년 여름 폴리코프의 카피에 “현혹돼(bewitched)” 금발로 염색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 썼을 정도였다.

클레어롤사의 저 아성에 로레알의 깃발을 다시 꽂는 게 스펙트 등의 숙제였다. 더구나 로레알사 신제품은 클레어롤사 제품보다 10센트나 비쌌고, 그들에겐 제품 출시일까지 단 4주의 시간밖에 없었다. 앞서 다른 팀이 만든 광고는, 경쟁사 제품보다 발색이 더 자연스럽고 모발도 부드럽다는 점을 부각했지만 품질 비교 검증 데이터가 없다는 이유로 막판에 폐기됐다.

“그들(남성 팀원들)은 창가에 여성 모델을 앉혀 두고 뭔가 하고자 했다. 풍성하고 화려한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 같은 공간. 여성 모델은 한 마디 대사도 없는 완벽한 오브제일 뿐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스펙트는 화가 났다고 말했다. “카피에 여성(woman)이라고 쓰면 나이 많은 남자 간부들이 소녀(girl)란 단어로 바꾸던 시절이었다.(…) 나는 남자들에게 멋져 보이기 위한 카피를 쓸 마음이 없었다.”

그의 카피와 구성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 2개의 시안이 채택됐다. 응용 버전은, 풀밭을 산책하던 연인 중 남자가 자신을 은근히 바라보는 여자를 두고 말하는 형식이었다. “그녀는 로레알에 들이는 돈엔 신경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녀는 소중하니까요.” 스펙트는 여성 모델이 직접 카메라를 보며 말하게 했다. 73년 첫 CF 영상 모델로 발탁된 배우 조앤 뒤소(Joanne Dusseau)의 광고 영상 멘트는 이거였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헤어컬러 제품을 씁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 모발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소중하니까요.”
로레알은 80년대 염색약 시장을 탈환했고, 케이트 윈슬렛, 비욘세 등 지역별 탑 스타들이 잇달아 저 카피를 마법의 주문처럼 읊었다. 90년대 한국의 첫 모델은 배우 황신혜였다.



일론 스펙트도 폴리코프처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작은 가구점을 운영했다. 16세에 시라큐스대에 진학했다가 가족이 LA로 이사하면서 UCLA로 학교를 옮겼지만 기숙사 룸메이트가 남자를 방에 들였다가 발각돼 그도 함께 퇴학 당했다고 한다. 10대 대학 중퇴자였던 그는 한 광고회사 비서를 거쳐 카피라이터가 됐고, 그 무렵 원래 이름(Illene)을 일론으로 개명했다.

66년 광고회사 ‘영앤루비캠(Young and Rubicam)의 신입 카피라이터 시절, 국제평화봉사단 공익광고를 맡아 꽤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젊은 부부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외신을 듣는 장면에 이어지는 멘트 “여러분은 위대하고도 넓고 멋진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은 가난과 무지, 질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화봉사단에 연락주세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몇몇 회사를 거쳐 70년 초 뉴욕의 ‘맥켄-에릭슨’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후 로레알 광고팀에 배정됐다. 70년대부터 말년까지 그와 함께 일한 광고인 마이클 시노트(Michael Sennott)는 “트렌드를 모방할 수 있는 카피라이터가 있고 트렌드 자체인 카피라이터도 있다. 스펙트는 사회의 지향, 특히 여성들의 지향을 정확히 대변하는 카피라이터였다”고 말했다.

그는 74년 훗날 남편이 되는 조던 맥그레이스(Jordan McGrath)가 세운 회사(Jordan McGrath Case & Partners)로 옮겨 카피라이터로, 말년엔 부회장 겸 광고담당 임원으로 일했다. 그 회사는 2000년 다국적 광고회사(Havas Advertising)에 인수됐다. 스펙트를 포함한 임원진이 잔류하는 게 인수 조건이었지만 그는 회사 매각을 직원들에 대한 배신으로 판단, 은퇴를 선언했다.

젠더와 피부색, 나이 등에 대한 광고의 편견은 지금도 더러 반복되고 있다. 가사와 육아의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직업적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광고, 핑크-블루의 젠더 이분법을 고수하는 광고도 있다.
2019년 폭스바겐사는 남자 우주비행사와 의족 운동선수를 보여준 뒤 유모차 앞에 앉은 여성을 대비시킨 광고로,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는 식당 컨베이어 벨트에 아이를 앉혀 뒀다가 뒤늦게 허둥대며 “엄마에겐 이르지 말라”고 말하는 젊은 아버지를 그린 광고로 영국 광고표준청(ASA)의 방영불가 처분을 받았다. “유해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광고 사례는 최근 것만 추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직업별 젠더 불평등 실태를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지나 데이비스 젠더 연구소(Geena Davis Institute)’는 몇몇 기관과 협력, 2006~2016년 사이 편견을 조장하는 카테고리별 광고 샘플을 분석, 2017년 보고서를 냈다. 남성 모델만 등장한 광고 비율이 25%인 반면 여성만 등장한 광고는 5%에 불과했고, 전체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2배 가량 광고에 많이 등장했다. 모델이 말하는 시간도 남성이 여성의 3배였다. 여성 소비자 66%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유포한다고 생각되는 영화나 TV쇼는 아예 꺼버린다고 답했다.

미디어와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리더와 인플루언서 등이 업계 전반의 젠더 편견을 극복하고자 만든 단체 ‘SHEHER’는 광고나 방송 프로그램 등의 성편향성을 정량화한 ‘젠더평등지수(GEM)’를 만들었다. 전세계 광고 시장의 87%에 해당되는 30만 개 이상의 광고를 평가하는 글로벌 평가 표준이다. SEEHER측은 GEM 점수가 긍정적일수록 기업 이미지는 물론이고 전체 및 여성 소비자의 해당 제품 구매 의향이 42% 높다고 분석했다.

스펙트는 맥그레이스 등과 두 차례 결혼-이혼했고, 아들 하나와 양녀 한 명, 양자 둘을 두었다. 뉴욕 맨해튼과 캘리포니아 오하이(Ojai)를 오가며 지냈고, 현역 시절 출장지 등에서 취미로 모은 기념품과 골동품들로 오하이에 소품가게를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와 로레알 광고 이야기를 담은, 벤 프라우드푸트(Ben Proudfoot) 감독의 짧은 다큐멘터리 ‘The Final Copy of Ilon Specht’를 촬영하던 무렵 그는 말기암(자궁내막염)으로 투병 중이었다. 영상에서 그는 73년 카피에 대해 "상품 광고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 모두가 각자 소중하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다큐 티저 영상에서 스펙트는 카피 원안을 들려 달라는 요청에 헐떡이는 숨결로 자신의 문구를 암송하다 시간이 없다며 끝을 맺지 못한다. 왜 시간이 없냐는 물음에 그는 부릅뜬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한다. "나 죽어가고 있잖아, 목소리가 안 나와."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