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국가연구개발(R&D) 사업에 적용돼온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를 전면 폐지한다고 밝힌 뒤 후속 대책을 내놨다. 속도감 있는 R&D 추진을 위해 1,000억 원 미만의 사업은 예타를 거치지 않고, 1,000억 원 이상 대규모 사업은 사업 성격별로 '맞춤형' 심사를 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평균 2, 3년이 걸렸던 R&D 사업 착수는 종전보다 빨라질 것으로 예상되나, 내실 있는 사업 평가는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획재정부는 4일 열린 제8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 투자·관리 시스템 혁신방안'을 최종 의결했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17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타 전면 폐지 방침을 발표한 바 있고, 이날 세부 추진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기존 제도대로라면 총 사업비 규모가 500억 원 이상이고 국가 재정 지원이 300억 원 이상인 R&D 신규 사업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경제성 분석 등의 조사를 거쳐야 한다. 통상적으로 예타 수행에만 평균 2년 이상이 소요돼, 사업 기획→예타 신청 및 수행→예산 요구→사업 착수에 3년 이상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속도전이 중요한 과학기술 개발에 예타가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정부는 예타 폐지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면서도, 재정건전성 확보 차원에서 맞춤형 심사를 하기로 했다. 우선 1,000억 원 미만의 R&D 사업은 일반적인 예산 심의만 거쳐 추진한다. 이를 통해 사업 착수에 걸리는 기간을 2년 이상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0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사업의 경우 예산 요구 전년도 10월 부처로부터 사업추진계획을 미리 제출 받아 민간 전문가들의 사전 전문검토를 거치도록 할 예정이다. 이후 3월 검토 결과를 통보해 부처가 사업 기획을 보완하고 예산 요구를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이 외에 대형 연구시설 구축이나 위성·발사체 등의 체계개발사업은 심사를 2단계로 나눠 진행한다. 1단계인 기본계획심사에서는 사업 추진 필요성을 검토하고, 2단계인 추진계획심사에서 사업 착수를 결정한다.
다만 이 개선안이 시행되려면 국가재정법 등의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 과학계는 연구 현장에 유연성이 좀 더 담보될 것이라는 반응이다. 이복직 서울대 항공우주학과 교수는 "그간 예타를 받지 않으려면 500억 원 한도에 R&D 규모를 맞추느라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앞으로는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임무지향적 R&D를 기획하는 데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료들의 예산 편성 권한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종유 전국공공연구노조 조직국장은 "현재로선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전문성 확보를 위해 어떤 법적 장치를 두는지 불분명한 상황"이라며 "부처 마음대로, 또는 관료 중심적인 사업 계획과 선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꼬집었다. 오민규 고려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도 "1,000억 원 이상 대규모 사업을 검토할 때 전문가의 역량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면서 "관련 분야 연구 동향에 대한 식견이 뛰어남과 동시에 국가의 R&D 정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 인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