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사이판 중심가 아메리칸 메모리얼파크에서는 제25회 마리아나 미식축제가 열렸다. 5월 매 주말마다 열리는, 지역에서 가장 큰 축제다. 현지 식당이 대부분 부스를 차리고 손님을 맞는다. 전통공연도 곁들여 차모로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일체감을 형성한다. 이날 가장 관심을 끈 이벤트는 국제푸드챌린지, 일명 ‘먹방대회’였다. 1시간 동안 약 9kg의 음식 먹기에 5명이 도전해 한국인 유튜버 상해기(본명 권상혁)가 우승을 차지했다. ‘짜고 치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한국 여행객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하는 인상이 짙다. 전체 사이판 여행객 중 한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70%가 넘는다. ‘작은 제주도’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부분 사이판 여행 상품에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마나가하섬 투어가 포함돼 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바다에서 패러세일링, 바나나보트, 호핑투어(스노클링) 등을 즐긴다. 그렇다고 현대식 즐길거리만 있는 건 아니다. 원주민인 차모로족의 역사와 전통을 잇고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섬 남서부 해안에 500세일스(500Sails)라는 비영리단체가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사이판에 도착했을 때 500명의 차모로인이 반겨 줘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차모로인이 외부인에게 건네는 환영 인사이자 호의를 반영한 작명이다.
창고같이 허름한 건물 벽면에 ‘삭만(Sakman)’이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삭만은 4,000년 역사의 차모로 전통 카누다. 엄밀히 말하면 사이판을 포함한 마리아나제도뿐만 아니라 미크로네시아, 하와이까지 고대에 태평양을 정복한 해양민족이 사용하던 배다. 배는 돛을 달고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인다. 항해 장비라고는 방향을 조절하는 키뿐이다. 이런 배로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누볐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500세일스는 1742년 사이판의 이웃 섬 티니언에서 발견한 전통 보트 설계도를 바탕으로 삭만을 제작했다. 전통에 현대 기술을 접목해 지금까지 14척의 배를 제작했고, 앞으로 재단의 명칭처럼 500척을 채우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현재 현지인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료 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삭만에 탑승해 약 20분간 주변 바다를 한 바퀴 돌아온다. 바람이 거의 없는 날이었는데도 돛을 펼친 배는 스릴이 넘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건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망망대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차모로인에게 삭만 항해는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이 동반하는 모험이었다. 무동력으로 남국의 바다를 누비는 체험자는 무한한 자유와 희열을 만끽한다.
500세일스 설립자 엠마 페레즈는 삭만 체험이 마리아나제도와 미크로네시아 전체의 전통을 잇는 사업이라 자부하고 있다.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차모로 4,000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체험”이라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단 홈페이지(500sails.org)에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이판에서 즐길 수 있는 또 의외의 체험이 별빛 투어다. 사이판 북측 해변은 민가가 거의 없어 밤이면 말 그대로 암흑천지로 변한다. 눈 밝은 업계에서 이 어둠을 놓칠 리 없다. 어스름이 깔리면 도심을 출발한 투어 차량이 해변도로를 따라 북측으로 이동한다.
새들의 천국이라는 새섬(Bird Island)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리고 섬의 최북단 만세절벽이 목적지다. 모두 하늘과 바다만 보이는 곳이다. 열대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따갑게 햇살이 내리쬐는가 싶다가도 비가 흩뿌리고, 소나기가 쏟아지는가 싶다가 금세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 밤 날씨도 다르지 않아 두어 시간 투어 동안 별 볼 일 없는 날은 거의 없다.
빛 공해가 심한 국내에서는 밤하늘에 적응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이판에선 적응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차량에서 내려 본능적으로 올려다본다. 쏟아질 듯하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대기 오염이 거의 없어 별빛이 맑고 선명하다. 별빛 투어 업체는 여기에 낭만을 입힌다. 텐트와 야영 의자, 돗자리와 소품 인형에 조명까지 준비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준다. 업체 직원은 어떨 땐 별이 너무 많아 사진을 보정하며 조금 지우기도 한다고 했다. 현지 여행사 ‘사이판어드벤처’에서 예약할 수 있다.
사이판 중앙 타포차우산(474m)에 오르면 남북으로 길쭉하게 뻗은 섬 전체가 한눈에 조망된다. 꼭대기에는 작은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며 겪어야 했던 아픔을 치유하듯 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다.
별다른 체험을 하지 않는다면 해안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투어는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보통 섬 최북단의 만세절벽에까지 갔다가 새섬과 주변의 작은 해변을 들르는 식이다. 80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 거친 바위와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는 만세절벽은 사이판의 대표적인 풍경 명소지만 한국인에겐 아픔과 한이 서린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7월 미군이 사이판에 들어오면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일본군이 ‘천황 만세’를 외치며 뛰어내린 곳이다. 뒤편 산자락의 일명 ‘자살바위’ 또한 당시의 비극을 품은 이름이다. 절벽 언덕에는 일본 각 단체에서 세운 위령비가 즐비하다. 이웃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전범국이 외려 피해자인 양 행세하는 듯해 마음이 착잡하다.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항복 대신 자살을 택했고, 이때 만세절벽으로 강제로 내몰린 한국인이 1만 명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인근에 ‘태평양한국인추념평화탑’이 세워져 있다. 일본보다 한참 늦은 1981년 건립됐다. 그래도 형식은 제대로 갖췄다. 위령탑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고, 상단의 독수리는 조상의 넋을 고국으로 모신다는 의미를 담아 한반도를 향하게 했다. 성조기, 태극기, 유엔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고 있는데 바로 옆 불꽃나무(플레임트리) 붉은 꽃송이 아래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세워져 있다.
북마리아나제도는 사이판을 비롯해 티니언, 로타 등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속령이다. 사이판에서 남서쪽으로 약 5㎞ 떨어진 티니언은 경비행기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섬이다.
상공에서 보는 티니언은 산 하나 없는 평평한 벌판이다. 티니언 투어는 태평양 전쟁 당시 파괴된 일본 군사시설을 훑는다. 일본군 무기저장고와 동굴 포대, 군 막사와 발전소, 활주로 등이 정글 곳곳에 폐허처럼 남아 있다. 대부분 미군에 포격당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선 썩 유쾌하지 않은 제국의 잔재들이다.
이곳에도 ‘평화기원한국인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사이판에 위령비를 세운 것도 1977년 티니언에서 5,000여 구의 한국인 유해가 발굴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강제 징용된 군대 노무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티니언의 도로는 대개 비포장인데 의외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직선이다.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8번가, 월스트리트, 할렘과 센트럴파크까지 뉴욕 맨해튼의 지명을 그대로 옮겨왔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깊게 남은 섬이니 자연스럽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가 연상되는데, 실제 섬을 이렇게 구획할 당시에는 그 프로젝트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알고서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을 최종적으로 보관했던 장소가 바로 이 섬이기 때문이다.
티니언의 풍경 명소로는 미군이 상륙했던 출루해변과 블로홀(Blowhole)을 꼽는다. 블로홀은 해안 암반에 파도가 들이치면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는 장소다. 때로 주변을 흠뻑 적실 정도로 쏟아지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해야 한다.
티니언에도 오래된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섬 주민 대부분이 몰려 사는 산호세 중심부에 ‘타가하우스’가 있다. 약 450년 전에 살았던 차모로족 추장의 저택이다. 추정하건대 섬에서 단연 돋보이는 대궐 같은 집이었을 텐데, 현재는 전통주택에 사용된 거대한 라테스톤이 공원에 쓰러진 모습이다. 최고 높이 4.6m에 이르는 큰 돌기둥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인데, 남쪽으로 1.2㎞ 떨어진 해변 암반에 채취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앞에 티니언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가해변이 숨어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인 수직의 바위 절벽 아래에 자그마한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고, 투명한 바닷물이 서서히 깊어지며 푸르름이 짙어간다. 속된 말로 ‘미친 물빛’이다. 누구라도 풍덩 뛰어들고 싶은 그 바다에서 동네 아이들이 해맑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헤엄치기가 심심하면 바위에 올라 스스럼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천진한 웃음이 바다처럼 푸르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풍경이다. 티니언은 개별 여행이 쉽지 않다. 현재 마이리얼트립에서 당일 투어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