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이웃 건물에 둘러싸인 좁은 땅의 한계를 넘어서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주어진 특명은 그랬다. 높은 밀도로 좁아진 땅 안에 두 채의 집을 짓는 것, 자유로운 내부 동선을 만드는 것, 친환경적이면서 쾌적한 방을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 건물은 주택에 대한 편견을 모두 깼다. 콘크리트와 나무, 박공지붕으로 이뤄진 수직 건물 두 채의 생경한 구도 속에 빛이 들고 바람이 난다. 40년 지기 두 친구가 같이 지은 주택 겸 스튜디오인 '무너미 스튜디오(대지면적 117.27㎡, 연면적 194.52㎡)' 얘기다.
김정인(55)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이 집의 설계자이자 건축주다. 또 다른 건축주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박종일(56) 무너미스튜디오 대표다. 김 교수는 건물 한 동에 살고, 박 대표는 다른 한 동을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사무 공간으로 쓴다. 한 살 차이인 두 건축주는 어릴 적 이웃으로 만나 같은 초중고교와 대학을 나왔다. 유학 기간 잠시 떨어져 있다가 김 교수가 귀국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부터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만나서 자전거를 탔거든요. 당시 아파트 값이 마구 오르던 시기였어요.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면서 무심코 '집값은 오르는데 주거의 질은 점점 떨어진다'는 얘기를 꺼냈더니 웬걸 친구가 그럼 같이 사무실 겸 집을 지어 보자고 하는 거예요.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싶었죠."
서울에서 혼자 지내던 김 교수에겐 주거 공간이, 출판사를 준비하고 있던 박 대표는 사무 공간이 필요했던 터였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오래된 주택가를 물색하던 중 마음에 드는 땅을 찾았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이는, '무너미'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에 남겨진 빈집에서 김 교수는 평소 구상했던 도시 주택의 가능성을 봤다. 117㎡의 작은 부지, 1인 가구와 스튜디오를 수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주택이 시작된 순간이다.
얽히고설킨 채로 높이 솟은 두 건물은 주변 집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띈다. 콘크리트 더미를 툭툭 쌓아 놓은 듯한 형태에 목재가 결합하면서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아파트와 주택 사이, 한국식 도심 주택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만들고 싶었던 김 교수의 바람이 빚은 결과물이다. "서울에서 가장 흔한 주거 공간은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잖아요. 그런데 아파트의 수명이 다한다면요?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으면 그 많은 폐기물을 어떻게 하나요. 이미 있는 구조물을 그대로 두고 주거 공간을 부품처럼 끼워 넣으면 어떨까 상상을 해본 거죠. 콘크리트 구조물을 '대지'로 여기면 내부 공간은 사는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채롭게 채워질 거라 생각했죠."
실제로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구조물이 설계의 주축이 됐다. 땅에서 자라난 듯 뾰족한 두 채의 건물은 어떤 면에선 아파트의 축소판이다. 목재로 마감한 큐브가 콘크리트의 틈을 메울 뿐 엄격한 질서란 없다. 일조권 사선제한(주변 주택의 일조권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한 사선 이내의 건축물 높이를 제한하는 것) 같은 법규를 받아들여 기본 뼈대를 만들고, 콘크리트와 경량목 구조, 스틸 계단이 엮일 때의 우연적 상황을 반영해 가며 디자인을 확정했다. 김 교수는 "전통과 현대, 공공과 개인, 콘크리트와 나무가 혼합돼 공생 구조를 이룬다"며 "지속가능한 주거를 위한 하나의 건축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미래 주거의 개념을 지향하는, 안팎이 난해한 주택은 다른 건축주인 박 대표의 이해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로 전공 분야를 넘나들며 수십 년간 생각을 교류한 막역한 사이에 설명과 설득이 필요치 않았던 데다 목적이 창작 스튜디오 공간이었던 만큼 실험적 요소가 큰 장점으로 발휘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잠깐 들르는 집'이자 '문화 활동이 벌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훨씬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죠. 다 건축가 친구를 둔 덕분이에요. 일반적으로 누리기 힘든 자유분방한 공간으로 완성돼 만족합니다."
얽힌 외관만큼이나 내부 공간도 복잡다단하다. 통상 5층 높이에 해당하는 15m 높이 건물은 4층으로 구성됐다. 아파트의 층처럼 높이와 체적이 균일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거실과 주방으로 구성된 오픈 공간과 큐브 형태로 끼여 들어간 두 개의 나무방을 연결하는 미로 같은 계단은 무려 14개. 김 교수는 "기본적으로 수직으로 같은 유닛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서 층이나 평수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기가 힘들다"며 "설명하긴 어렵지만 실제 살아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다"고 했다.
환경에 조응하는 '셸터'로서의 역할도 내부 설계에 반영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모든 공간에서 동일한 실내 온도로 생활하는 아파트는 항시 온화한 기후대에 적합한 주거 방식이다. 한국은 여름에는 40도에서 한겨울에는 영하 15까지 기후 변화 폭이 커 일정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에너지 낭비가 뒤따른다. 무너미 스튜디오는 층마다 설정 온도가 달리해 겨울에는 평균 9도, 여름에는 평균 4도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옥을 들여다보면 온돌 실내와 대청이 구분되고 쓰임새가 계절별로 바뀌는데 그게 전통적인 셸터의 역할입니다. 그 개념을 가져와 잠을 자고 좌식 생활을 하는 온돌 큐브는 17도, 거실과 주방은 12도, 현관은 6도로 설정했죠. 3, 4층 작은 방에서는 가볍게 입고, 2층 열린 공간에선 스웨터를, 현관에선 겉옷까지 입는 거예요. 환경에 따라 행동을 달리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행동하는 '패시브하우스(에너지 절감 주택)' 실험인데 한겨울에도 한 달 에너지 비용이 10만 원을 넘지 않았으니 성공 아닌가요(웃음)."
김 교수는 건축가로서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촉감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아파트와 주택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인공 혹은 자연 재료를 구별해 집을 짓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었다. 그 감각이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조화 속 사회적 맥락을 입혀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설계부터 시공까지 도맡아 독특한 촉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일한 베테랑 작업자마저 난색을 표하게 하는 까다로운 공정 탓에 공정이 바뀔 때마다 사람이 바뀌거나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질적인 재료 조합 때문에 디자인 변수가 많아 현장에서 챙겨야 할 것도 많았다. 작업 난도가 높고 공사 기간이 늘어나 처음 계획보다 공사비도 30% 더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건축주의 신념과 의지를 집요하게 따라간 집은 '가장 한국적인 도시 주택'이라는 본래 목적에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설계한 집에 살아보며 차이를 느끼고, 실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건 건축가로서 누리기 힘든 호사죠. 자식을 보는 기분도 들고요. 두 채의 집이 지구에 잘 뿌리내리고, 동네에 배경처럼 스며들어 각자의 라이프를 이어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