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장면이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했어요." 대학생 이연우(가명)씨는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를 중반까지 보다가 시청을 중단했다. 갈수록 잔혹해지는 데다 고문 장면까지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고문 장면은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을 본 것만으로도 소름 끼칠 정도로 기괴했다.
그는 "폭력성이 굉장히 높았던 '오징어 게임'보다도 훨씬 자극적인 드라마를 서울 삼성동, 명동의 큰 전광판에서 광고하는 게 맞나 싶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를 본 김다은(28)씨와 김성현(23)씨도 오래, 반복적으로 나오는 폭력 장면에 "정신이 피폐해져" 해당 장면은 건너뛰기하며 봤다.
'더 에이트 쇼'는 넷플릭스의 상반기 최대 기대작이자 '제2의 오징어 게임'으로 주목받는 드라마다. 게임 참가자들이 거액의 상금을 받는 설정이 오징어 게임과 유사하고 천우희, 박정민, 류준열 등 톱스타들이 출연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갈수록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미디어와 이를 부추기는 대중 등 '도파민 사회'를 비판하는 드라마다.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가 잔혹한 벌칙과 고문, 신체 훼손 등 온갖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너무 피로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오징어 게임'(2021) 성공 이후 심화돼 온 넷플릭스 콘텐츠의 폭력성과 자극성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 에이트 쇼'는 참가자들이 재미있는 쇼를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게임을 다룬 드라마다. 자극에 대한 역치가 높아지면서 콘텐츠의 폭력과 선정성도 갈수록 높아지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드라마는 쇼의 폭력 수위가 올라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재현한다. "폭력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게 함으로써 폭력을 옹호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는 게 이 드라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설명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맞아서 다친 얼굴을 사실적으로 분장해 클로즈업한 드라마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폭력과 고문 장면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여주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오수경 드라마 비평가는 "넷플릭스의 폭력적 콘텐츠가 '더 에이트 쇼'에서 임계점에 다다랐고, 시청자들도 이에 대해 피로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며 "과도한 자극성과 선정성으로 주목을 끄는 게 윤리적으로 타당한지 고민할 때"라고 지적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폭력을 폭력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며 "'오징어 게임' 이후 폭력성, 선정성의 강도가 매우 높아져 요즘 많은 넷플릭스 드라마가 이런 내용"이라고 꼬집었다.
'오징어 게임' 이후 만들어진 넷플릭스 드라마인 '더 글로리'(2022~2023)와 '마스크 걸'(2023) 등은 모두 폭력 수위가 높았고, 지난 2월 공개된 '살인자ㅇ난감'에서는 살인 장면이 반복됐다. 올해 하반기 공개 예정인 '오징어 게임 시즌2' 등에서도 이 같은 기조는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왓챠 등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공중파 방송과 달리 아무 규제를 받지 않아 폭력성과 선정성이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극의 흐름상 피할 수 없는 일부 폭력적 장면마저 설득력을 잃는 것은 드라마 전반의 완성도 때문이기도 하다. 전형적이고 낡은 캐릭터는 시청자의 공감이나 성찰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오수경 비평가는 "'더 에이트 쇼'는 가장 낮은 계급의 장애인 캐릭터에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담았다"며 "미디어가 사회적 약자를 나쁘게 묘사하면서 이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것도 우려스러운 지점"이라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 역시 한 여성 참가자(한미녀)가 자신의 성을 생존과 교환하는 것으로 그려 현실을 왜곡하는 재현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넷플릭스가 세계적인 OTT로 자리매김한 만큼 콘텐츠의 질적인 성장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대부분의 콘텐츠 서비스가 초기에는 선정적인 작품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전략을 사용해 왔지만, 넷플릭스는 글로벌 대중성을 확보한 만큼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넷플릭스의 초기 회원은 장르물을 좋아하는 남성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여성과 다양한 연령이 구독하면서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스 사극이 글로벌 차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며 "시각적 자극에 기대는 콘텐츠가 아닌 위상에 걸맞은 다채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