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코리아 모, 생큐"... 아프리카, 한국식 모내기 신바람

입력
2024.06.0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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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톳빛 아프리카 대지를 뒤덮은 연둣빛 모를 찾아가는 여정은 소란스럽고 척박했다.

똑똑. 차를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머리만 빼꼼 올라온 어린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거뭇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돈을 달라는 의미였다. 차선이 희미해진 도로는 자동차 반 사람 반이었다. 머리에 인 대야 가득 물건을 파는 사람,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어렵사리 지나자 붉은 흙길이 나왔다. 전날 온 비가 잔뜩 고여 있는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흙먼지를 일으킨 지 50여 분. 일렁거리는 연둣빛 물결이 보였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파도쳤던 연둣빛 물결의 정체는 줄 사이 30㎝, 포기 사이 15㎝ 간격으로 심어진 '모'였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는 카메라 광각 렌즈로도 한 번에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축구장 6개가 족히 넘을 법한 넓이의 논에는 긴 줄을 따라 한 줄로 서서 허리를 굽히고 있거나, 무릎 높이로 올라온 모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논 한편 못자리에서 자란 모(육모)를 바구니에 옮겨 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랑 사이를 찰랑이는 물소리와 진흙을 가르며 모가 꽂히는 '철퍼덕' 소리, 흥얼거리는 목소리와 못줄을 옮기기 위해 간간이 들리는 "헤이" 신호가 연두 물결과 함께 어우러졌다.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빵을 갓 기름에 튀긴 새참이 도착하자, 내내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남성 예닐곱 명이 우르르 나왔다.

지난달 22, 23일 찾은 가나 아크라주 다웨냐 평야에 있는 코피아센터 시범포(시범 생산단지)에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논에 볍씨를 흩뿌려 민둥산 같은 논에서 쌀을 재배하는 아프리카에선 쉽게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시범사업으로 작년에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 상륙, 올해부터 본격 추진되고 있는 'K라이스(쌀)벨트' 사업이 아프리카에 새로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 중 하나다.


한국의 종자와 농업 기술을 전수해 아프리카 국가의 쌀 생산을 돕는 K라이스벨트 사업은 순항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아프리카 7개 나라 중 가나에서 처음으로 '벼 종자 생산단지' 건설이 시작됐다. 100㏊가 넘는 넓이에 지어지는 이곳에는 다웨냐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관개시설도 함께 지어진다.

지난달 23일 열린 벼 종자 생산단지·관개시설 착공식에 참석한 야우 프림퐁 아도 가나 식품농업부 차관은 "한국이 개량한 벼 종자가 이렇게 성공하고 커질 줄 몰랐다"며 "이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돼 영광이고, 진심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준 농림축산식품부 K라이스벨트 단장은 "과거 대한민국도 쌀이 부족해 식량 원조를 받았지만, 1977년 통일벼로 쌀 완전 자급을 달성하는 '녹색혁명'을 통해 쌀 걱정을 하지 않게 됐다"며 "어려움을 극복하며 쌓아 올린 우리의 기술과 경험을 전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착공식을 찾은 이들의 시선은 인근 가나 코피아센터의 시범포에 한참 머물렀다. 제일 먼저 시범사업이 시작, 착공식까지 진행된 가나는 아프리카 K라이스벨트 사업 성공여부의 가늠자이자 선발대로 꼽힌다.

시범포에는 벼 품종인 아가야파(Agayapa)와 코리아 모(Korea Mo), 이스리6(ISRIZ-6), 이스리7(ISRIZ-7) 등이 한국식 모내기 방법으로 심어져 있었다. 통일벼 계통인 밀양23호와 태백 등을 현지 토양과 날씨 등에 맞춰 개량한 'K쌀 종자'들이다. 종자들이 자라고 있는 푸른 논은 벌써 축구장 89개 크기(63.5㏊)나 된다. 작년엔 시범사업으로만 목표치 300톤을 웃도는 양의 벼가 재배되기도 했다.


김충회 가나 코피아센터 소장은 "다수성(다수확) 보급종이 성공적으로 재배되고 있어 농민의 참여 열기가 뜨겁다"며 "통일벼는 100일이면 다 자란다. 비료만 보완된다면 1년에 3번까지도 재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땀 흘리는 농민들의 반응도 좋다. 본답 한편 못자리에서 자란 모(육모)를 바구니에 옮겨 담던 리처드 마테이 아플레 다웨냐 관개지구 농민대표는 "한국식 재배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니 벼가 이렇게 빼곡하게 자랐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는 "선 밖에 난 것들은 우리 벼에 해가 되는 '이형벼'이기 때문에 모두 걷어내라고 배웠다"며 "빨리 수확해서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는 대부분의 농사를 수작업으로 한다. 트랙터와 콤바인 같은 농기계가 없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한국에서 들여온 농기계도 점질토 함량이 높은 아프리카 토양에선 바퀴가 빠져 속수무책이다. 모를 이앙하고 수확할 때 온 마을 사람이 팔을 걷어붙여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힘든 기색 하나 없다. 부모에게 육모를 전달하던 아멘야(16)가 활짝 웃으며 "생큐"를 연발했다. "코리아에서 왔어요? 코리아 모 고마워요. 우리 가족 맛있는 밥 먹을 수 있어요. 코리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가 손을 내밀었다.


K라이스벨트 사업은
벼 종자부터 생산 기반, 유통 체계까지 쌀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한국의 노하우를 아프리카에 전수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다. 쌀을 원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아프리카 국가 스스로 2027년까지 다수확 벼 종자 1만 톤을 생산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연간 3,000만 명에게 안정적으로 쌀을 공급하는 게 목표다. 지난해 착수한 후 올해부터 본격 추진하고 있다. 현재 서아프리카(4곳), 중앙아프리카(1곳), 동아프리카(2곳) 등 총 7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으며, 3개 나라가 추가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상태다.
[K녹색혁명, 아프리카를 가다]
글 싣는 순서 <상> 생명의 쌀띠, K라이스벨트 <하> 벼만 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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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라·다웨냐(가나), 다카르(세네갈)= 조소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