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이 주어지는 이유

입력
2024.06.03 04:30
27면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중국 송나라 재상 조보는 태조 조광윤을 도와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이다. 그가 평생 읽은 책이라곤 달랑 '논어' 한 권뿐이었고, 그나마 절반밖에 읽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보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기발한 대책을 내놓는 능력자였다. 이로 인해 조보에게는 '논어 절반을 읽고 천하를 다스렸다'는 칭송이 뒤따랐다. 건국 이후 50년 동안 정치에 종사하면서도 별다른 흠이 없었기에 태조는 그를 각별히 신임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직한 탓에 때로는 태조의 심기를 거슬렀다.

하루는 조보가 태조에게 어떤 사람을 추천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니 관직을 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조가 보기에는 탐탁지 않은 사람이었나보다. 태조는 조보의 추천을 거부했다. 이튿날 조보는 그 사람을 다시 추천했다. 태조는 또 거부했다. 그다음 날도 조보는 그 사람을 추천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태조는 조보가 바친 추천장을 갈기갈기 찢어 땅에 던져버렸다. 조보는 태연한 얼굴로 무릎을 꿇더니 찢어진 추천장을 주워 모아 물러갔다. 다음 날, 조보는 찢어진 추천장을 풀로 붙여 바치며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추천했다. 태조는 그제야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보가 추천한 사람을 관직에 임명했다.

한번은 태조가 싫어하는 관원이 승진할 차례가 됐다. 태조는 결재를 거부했다. 조보가 나서서 결재를 요청하자 태조가 말했다. "내가 승진시키지 않겠다는데 경이 어찌할 것인가?" 조보가 대답했다. "상벌은 천하의 것이지 폐하의 것이 아닙니다. 어찌 좋거나 싫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성난 태조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조보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태조가 처소로 들어가자 조보는 그 앞에 서서 떠나지 않았다. 태조는 결국 고집을 꺾고 조보의 요청을 따랐다. '송사' '조보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을 관직에 추천하는 것은 재상의 업무이고, 그 사람을 관직에 임명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군주의 권한이다. 재상이 추천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군주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다만 거부권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수단이지, 유불리를 따져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는 데 반대 의견이 있다면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반대를 무릅쓰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거부를 거듭할수록 불통의 이미지는 굳어지고 의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