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침엽수라는 공통점을 지닌 소나무(松)와 잣나무(栢). 두 나무는 오래전부터 고고함의 상징으로 통했다. 송백후조(松栢後凋·소나무와 잣나무는 뒤늦게 시든다)라는 사자성어가 생길 정도다. 청렴한 두 나무는 상생관계여서, 송무백열(松茂栢悅·소나무의 번성을 잣나무가 기뻐한다)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일보는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70년생 소나무에 비유되는데, '송무백열'처럼 함께 성장하며 다수의 인물과 서로를 돕고 존중하는 인연을 맺었다.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창간 70주년을 맞아 축하와 당부의 메시지를 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대한민국 1호 앵커맨’ 봉두완(89) 전 의원. 그는 한국일보 시절을 추억하며, 유연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기자 정신을 한국일보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봉 전 의원은 새내기 언론인이던 1962~1968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동양방송 등에서 앵커를 맡아 박 정권에 날카로운 풍자와 ‘촌철살인’으로 청취율 43%를 기록했다. ‘한국 최초의 뉴스 앵커’라고 불리는 이유다. 봉 전 의원은 “기자와 특파원을 비롯해 앵커, 국회의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미클럽 회장 등 다양한 일을 거쳤지만, 지금까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한국일보 기자였다는 것”이라고 했다.
큰 인기를 누렸지만, 외압으로 일부 프로그램에서 중도하차하는 등 위기도 많았다. 봉 전 의원은 “한국일보 시절 언론이란 무엇인가,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면서 “한국일보 상징색이 초록색이다. 한국일보를 떠난 지 어언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 몸엔 초록색 기자 정신이 면면이 흐르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청춘을 함께했던 한국일보가 벌써 70주년을 맞는다니 감회가 새롭다”면서 “마음의 고향인 한국일보를 지탱하고 지켜준 경영진 이하 임직원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수고했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세계 최초로 해발 8,000m 이상 16개 봉우리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64). 그는 대한민국 탐험가들을 대표해 한국일보에 축하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엄 대장은 1988~2007년 세계의 고산 16좌를 등정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38번의 좌절과 실패를 모두 극복한 ‘도전’의 아이콘이다. 엄 대장은 “역사적 도전의 현장엔 늘 한국일보가 있었고 한국일보가 없었다면 이 많은 성공 신화는 없었을 것”이라며 “오늘날 대한민국이 산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일보는 1977년 9월 15일 산악인 고상돈(당시 29세 대원)씨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 최정상에 태극기를 꽂기까지 2년여에 걸친 도전의 전 과정을 지원하고 특종 보도했다. 당시 등반 성공으로 한국은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국가가 되었으며, 몬순 기간 등정으로는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됐다.
한국일보는 이후에도 △79 한국 매킨리 원정대 △시베리아 횡단 2만5,000리(이상 1979년) △허영호 대장의 남극대륙 최고봉 등정(빈슨 매시프·1995년) △박영석 대장의 세계 2위 봉우리 K2(8,611m) 원정 △‘철인 요트맨’ 강동석씨의 3년 5개월에 걸친 요트 세계 일주(이상 1997년) △홍성택 대장의 그린란드 탐험대(2011년) 등 대한민국의 도전과 탐험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갔다. 엄 대장은 “한국일보가 국민들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준 만큼 한국일보 역시 다가오는 새로운 70년을 위해 힘차게 도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일보가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최초의 시도를 주도했다면, 장윤정(54)씨도 대한민국 미인대회 역사에서 다수의 최초라는 단어를 갖고 있다.
장씨가 배우와 진행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출발점은 한국일보의 대표 사업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였다. 1987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미스 대구 진에 뽑힌 데 이어, 본선에서도 진에 선발됐다. 당시 그가 기록한 ‘최연소 미스코리아’ 기록(만 16세)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듬해인 1988년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해 대한민국 역대 최고 순위(2위)에 올랐는데, 이 기록 역시 최미나수(2021년 미스코리아 선)가 2022년 미스 어스에서 우승하기까지 무려 34년 동안 ‘세계 미인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장씨는 한국일보에 보내 온 축하 영상에서 “한국일보와 정말 오랜 인연을 맺었고, 제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며 “당시(1980년대)에는 연예계로 진출할 관문이 많지 않았는데, 한국일보사가 다리 역할을 했고 중요한 기회를 줬다”고 회상했다.
미스코리아와 유니버스를 통해 ‘전설의 미스코리아’로 이름을 올린 뒤, 장씨는 1990년대 각종 TVㆍ라디오 프로그램 MC로 활약했다. 2016년에는 영화 ‘트릭’에, 2021년에는 영화 ‘내겐 너무 소중한 너’에 출연하는 등 연기 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장씨는 “방송계에 진출해서도 많이 모자란 저였지만 그때마다 한국일보가 큰 힘이 됐다”면서 “70년간 대중 문화를 선도해 온 만큼 한국일보가 앞으로도 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뽀빠이 이상용입니다.”
2016년 봄까지 매월 셋째 주 일요일 오전 6시, 서울 남산에서 울려 퍼지는 힘찬 목소리가 있었다. 국내 최초의 걷기 대회인 ‘한국일보 거북이 마라톤 대회’ 사회자 이상용(80)씨의 목소리였다.
이씨는 거북이마라톤이 첫걸음을 떼던 1978년 5월 21일 제1회 대회부터 2016년 3월 19일 제455회 대회까지 무려 38년 동안 시민들의 친근한 사회자로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 ‘터줏대감’이었다. 이씨는 본보 인터뷰에서 “이제 와 돌아보니 한국일보 역사 70년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국일보와 함께했다”면서 “수백 명이 모여 남산 둘레길을 걷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일보가 독자들의 건강까지 챙긴 셈”이라며 웃었다.
이씨는 1990년대 우정의 무대 등 ‘원조 국민 MC’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봉사, 모금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봉사하는 연예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공익성이 큰 언론사 최초의 걷기 대회였기에 저 역시 즐겁고 명예로운 마음으로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여행할 때 기내 가판대에서 언제나 나의 선택은 한국일보다. 우리 사회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일보가 앞으로도 사회 곳곳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환하게 비춰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일보에서 배운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세, 지금의 김현정을 지탱하는 아주 귀한 가르침입니다.”
매일 아침 정치·사회 이슈를 뿌리 깊게 파헤치며 분석하는 ‘대한민국 최고 앵커’ 김현정(46) CBS 앵커는 한국일보 62기 견습기자(2000년 4월 입사) 출신이다. 어린 시절 꿈을 좇아 방송 앵커, PD로 방향을 조금 바꿨지만, 그는 “한국일보에서 보낸 1년이란 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김 앵커는 “사회 초년병 시절 한국일보에서 세상을 보는 눈, 공정하고 편견 없는 시각, 약자 편에 서는 용기 등을 배웠다”면서 “이런 것들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앵커로서의 초석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 앵커는 지난 2020년부터는 색다른 방법으로 한국일보와 다시 인연을 맺고 있다. 한국일보가 진행하는 명품 교육 프로그램 한국아카데미 강사로 나선 것. △미디어의 변화, 리더의 변화 △뉴스쇼 12년, 성공의 기록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하며 꾸준히 한국일보와의 접점을 이어가고 있다. 김 앵커는 “제가 그렇듯, 많은 독자들도 한국일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한국일보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영원하세요, 사랑합니다”라며 웃었다.
‘영원한 바둑 황제’ 조훈현(71) 9단도 한국일보와 끈끈한 인연이 있다.
국내 기전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일보 명인전에서 조 9단은 1978년(9회) 우승컵을 차지한 이후 무려 12차례나 ‘명인’ 반열에 올랐다. 특히 1984~1990년에는 7년 연속 명인전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명인전 55년 사상 최다 연속 우승이다. 아울러 준우승 7차례, 최다 결승전 진출(19회) 기록도 갖고 있다.
조 9단은 1980년 7월 명인전(제11회)에서 서봉수 9단을 꺾고 우승, 세계 바둑계 최초로 ‘전관왕’(명인전 포함 9개 대회 우승)이 됐던 때를 최고 순간으로 기억했다.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2승 2패로 맞선 명인전 최종국에서 승리하면서 세계 최초 바둑 전관왕에 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그래서 명인전이 더 뜻깊었고 한국일보에 대한 애착도 강한 것 같다”며 웃었다.
바둑기사의 전성기는 보통 1~2차례이지만, 조 9단은 약 30년에 걸쳐 3~4차례나 반복됐다. 특히 4차 전성기의 상대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이창호 9단이었던 점은 그가 ‘불굴의 기사’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실제로 1991~2004년 명인전 우승컵은 이창호 9단이 모두 휩쓸다시피 했는데, 유일하게 1997년 이 9단의 대회 7연패를 막아선 이가 바로 조훈현 9단이었다. 조 9단은 “한국일보는 지난 70년 동안 정치 사회 경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바둑을 포함해 문화 사업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면서 “앞으로도 문화계에 많은 공헌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