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필리핀 정부가 양안(중국과 대만) 갈등 국면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리핀과 대만 모두 자국 주권을 위협하는 중국과 물리적 충돌을 빚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 반응이다. 현 필리핀 정부의 대중(對中) 강경 기조를 두고도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30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필리핀 여론조사 기관 WR누메로 리서치가 자국 성인 남녀 1,76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6%는 “필리핀 정부가 대만 문제에서 중립을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답변했다. 정부가 국제 문제보다 국내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응답도 75%에 달했다.
이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행정부가 대만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과 대비된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는 중국은 친미·독립 성향 민주진보당(민진당) 소속 라이칭더 대만 신임 총통 당선(올해 1월) 이후 줄곧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대만 인근에서 커지는 중국 군사 위협 불똥이 자국으로 튈까 경계한다. 필리핀과 대만은 바시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대만 남부와 필리핀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북단 간 직선거리는 350㎞에 불과하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경우 필리핀이 관여하지 않는 시나리오는 생각하기 어렵다”며 “우리는 (대만 분쟁) 최전선에 있다고 느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게다가 대만에는 필리핀 노동자 15만 명이 거주한다. 대만 유사시 이들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이 빠른 대응에 나설 수 있도록 미군의 루손섬 군사기지 이용을 허용했다. 이달 24일에는 대만 인접 최북단 섬에 해안경비대 기지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설문조사에서 정작 국민 다수는 정부가 양안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꺼린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필리핀 국민 3명 중 1명은 남중국해를 둘러싼 현 정부의 중국 대응 수위에도 불만을 표시했다. 응답자 65%는 ‘남중국해에서 긴장이 악화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해결 방향을 두고는 찬반이 갈렸다.
33%의 응답자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대응 방향이 옳다”고 답했고, 5%는 “(대응이) 훌륭하다”고 응답했다. 반대로 “대응이 바람직하지 않다(21%)”거나 “매우 나쁘다(6%)”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3명 중 1명(34%)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조사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필리핀 물품 보급선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필리핀 해경이 맞대응에 나서던 시기인 지난 3월 12~24일 실시됐다. 해상 주권을 두고 양국 긴장이 연일 격화하고 있지만, 정작 필리핀 국민 사이에서는 정부의 대중국 견제 움직임에 의문을 드러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