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국제형사재판소(ICC) 고위 관리를 상대로 9년간 도청과 해킹, 염탐 등을 일삼아 온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나 이스라엘방위군(IDF) 고위급 인사 등의 전쟁범죄에 대한 ICC 수사를 방해하려 한 것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조차 ‘선을 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최근 네타냐후 총리에 대해 ICC가 체포영장을 청구하기 훨씬 전부터 은밀하게 ‘전방위 감시’를 해 왔다는 얘기다.
영국 가디언은 28일(현지시간) 이스라엘 기반 매체인 ‘+972’, ‘로컬 콜’과의 공동 취재를 통해 “이스라엘 정부가 거의 10년에 걸쳐 ICC에 맞서 ‘비밀 전쟁’을 치러 왔다”고 보도했다. 전현직 이스라엘 정부 및 정보당국 관리, ICC 고위 인사, 외교관, 변호사 등 20명 이상으로부터 ‘이스라엘 정보부가 ICC 전·현 검사장 등 다수 관계자의 전화 통화, 문자 메시지, 이메일 등의 내용을 가로챘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ICC 감시’는 2015년 1월부터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이 ICC 가입국이 되면서 이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범죄에 대한 ICC 수사가 가능해진 탓이다. “외교적 테러”라며 격하게 반발한 이스라엘은 국내 담당 정보기관인 ‘신베트’, IDF 정보국인 ‘아만’, 사이버 정보국 ‘8200부대’를 동원해 ICC 활동 염탐에 나섰다. 정보 수집 결과는 법무부·외교부·전략부와도 공유됐다.
특히 2015년 팔레스타인 전쟁범죄 예비 조사에 착수한 파투 벤수다 전 ICC 검사장은 집중 타깃이 됐다. 그와 직원들 간 통화는 정기적으로 감청됐다. 한 소식통은 “이스라엘 정보부의 화이트보드에는 감시 대상 60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절반은 팔레스타인인이었고, 나머지는 유엔 관리나 ICC 직원 등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IDF 소식통은 “ICC 감시에 우리의 자원을 쓰는 것은 군 정보기관으로서 합법적 행위가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심지어 ‘직접 위협’도 가해졌다. 2018년 당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국장이었던 요시 코헨(2016~2021년 재임)이 해외에서 기습적으로 벤수다 전 검사장 앞에 나타나 놀라움을 안겨 준 게 대표적이다. 벤수다 전 검사장 남편을 몰래 찍은 사진을 보여 주거나, 남편의 문제적 발언 녹취를 외교가에도 퍼뜨렸다. 조사 중단 압박을 가한 위협적 언행이었다.
2021년 6월 취임한 카림 칸 ICC 검사장 역시 집중 감시를 받았다. 당초 칸 검사장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지난해 10월 발발한 가자지구 전쟁이 상황을 바꾸었다. 몇 달간의 감시를 통해 이스라엘은 지난 20일 칸 검사장이 네타냐후 총리 체포영장을 청구하기에 앞서 그의 의사를 사전 파악했다고 한다. 가디언은 “칸이 영장 청구를 앞두고 미국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고 전했다. 한 정보 소식통은 “네타냐후가 ICC 정보 수집 작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특히 감청에 집착한다”고 말했다.
ICC는 보도 내용을 사실상 인정했다. ICC 대변인은 “재판소에 적대적인 여러 국가 기관이 정보 수집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재판소의 핵심 정보는 침해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거짓되고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