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더위도 잊은 채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남산공원 앞 오래된 빌라의 옥상. 빨랫줄에 매달려 햇볕을 쬐며 간간이 춤추는 옷들이 정겨워서였다. 산책을 즐기던 직장인 몇몇은 휴대폰으로 그 풍경을 찍느라 바빴다.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 두브로브니크 같다며 손뼉도 쳤다. 빨간 지붕에 창이 많은 집 앞 골목에서 발레를 하듯 발끝을 한껏 세우고 빨래를 널던 (그곳의) 소녀가 떠올랐다.
엄마도 마당에서 빨래하는 걸 좋아했다. 큰 대야에 푹푹 삶아 건진 이불 홑청을 넣고 발로 밟아 헹굴 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헹군 물이 말개지면 홑이불 양 끝을 잡고 엄마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깔깔거렸다. 우리 집 강아지 누렁이도 왈왈대며 뛰어다녔다. 빨랫줄에 배꽃처럼 하얀 홑이불이 널리면 엄마는 누렁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누렁아, 빨래 잘 지켜~ 더우면 이불 그늘에 누워 쉬고~”
대문을 열고 살던 시절. 빨랫줄에 널어 둔 옷과 운동화를 잃어버린 후 누렁이의 임무는 막중했다. 기특하게도 누렁이는 빨래가 말라 걷을 때까지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 있었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흠이 있긴 했다. 식구들이 들어와도 당장 물어 죽일 듯이 짖어댔으니까. 그야말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얼마나 됐을까? ‘하루+ㅅ+강아지’로 봐서 하루 된 강아지로 생각하는 이가 많겠다. 그런데 갓 태어난 강아지가 뛰고 짖고 빨래까지 지켰을 리가 없다. 하룻강아지는 날짜를 뜻하는 하루하곤 전혀 관계가 없다.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1년 된 강아지다. 어리고 철이 없어 물고 짖고 날뛰고,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다. 사람이 무서워하는 범한테도 막 대든다. 태어나 본 게 많지 않고, 해 본 것도 별로 없으니 무서운 게 있을 리 없다. 경험이 적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람을 얕잡아 이를 때 하룻강아지라고 하는 이유다.
하룻강아지는 하릅강아지가 변한 말이다. ‘하릅+강아지’ 구조다. 하릅은 짐승의 나이를 표현한 말로, 한 살을 뜻한다. 하릅송아지, 하릅망아지처럼 쓸 수 있다. 두릅은 두 살, 사릅은 세 살, 나릅은 네 살이다. 하룻강아지가 널리 쓰이고 있지만, 하릅강아지도 여전히 표준어로 살아있다.
세탁기와 건조기 덕에 생활이 편안해졌다. 20세기 여성 해방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가끔은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처럼 쨍한 햇볕 아래 빨래를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고 싶다. 우리 집 사릅강아지 벨이도 누렁이처럼 잘 지켜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