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출근하는 길가에 벌써 원추리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잘 자라서 무리를 이루어 피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줄기 끝에 꽃이 여러 개가 뭉쳐서 피는 ‘큰원추리’라는 우리나라 자생종이었다. 원추리는 초여름부터 우리나라 산과 들에 많이 피고, 어릴 적 고향에서도 많이 보던 꽃이라 볼 때마다 늘 정겹고 반가운 꽃이다.
수도권에 있던 공공기관들이 이전하면서 만든 혁신도시에는 조경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심겨있다. 이제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었으니 환경에 잘 적응한 식물들은 잘 자라고 있고, 아닌 종류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큰원추리는 전주와 완주에 걸쳐있는 전북혁신도시와 가까운 덕유산에 많이 자라는 식물이니, 이곳 환경에 잘 맞는 것으로 보인다. 큰원추리는 대략 6월부터 꽃이 피는데 금년엔 한 달 정도 먼저 피었다. 올봄 유난히 기온이 높았던 탓에 다른 봄꽃들처럼 원추리도 일찍 꽃이 핀 것이다.
원추리 종류의 식물들은 대부분 웬만한 비바람에도 잘 견디며 자란다. 질긴 잎은 가늘고 길어서 장마와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 한낮에 가늘지만 억세게 올린 꽃대에서는 밝고 늠름한 노란색의 큰 꽃이 핀다. 꽃이 귀한 우리나라 여름 산야의 풍경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원추리라는 이름은 한자 이름인 ‘훤초(萱草)’의 발음에서 유래한다. 과거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훤당(萱堂)'이라 했는데, 어머니들의 집 안 생활 공간인 안채 뜨락에 많이 심었었나 보다. ‘조선식물향명집(1937)’에는 ‘넘나물’이라는 이름이 같이 기록되어 있고, ‘산림경제’에는 ‘광채(廣菜)’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어린잎은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다.
꽃이 피기 직전 꽃망울이 사내아이를 떠올릴 수 있는 모양임을 빗대어 결혼한 부부에게 아들을 낳기 바란다는 의미로 원추리 꽃 그림을 그려 주던 데에서 비롯된 '의남초(宜男草)'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원추리는 우리나라의 여름철 고온과 장마철 과습, 여러 번 맞게 되는 태풍에도 잘 견딜 수 있는 강인하고 대단한 적응력을 지녔다. 그런 특성 때문인지 쳐다보면 근심을 잊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망우초(忘憂草)'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코로나19는 종식되었지만 전쟁, 이상기후, 인구소멸, 물가 불안, 병해충 발생 등의 여파로 나라 걱정, 자식 걱정, 농사 걱정이 많은 요즘이다. 초여름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피어 출근길에서 만나는 원추리가 그래서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