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소녀 성폭행, 아내 삼은 무법자... 대낮 피살에도 주민은 못 본 척했다

입력
2024.05.31 04:30
15면
<81>무법자 켄 맥엘로이 살인 사건
방화, 미성년자 강간 일삼은 폭군
22차례 체포에도 유죄 처벌 피해
총격 사망... 60명 목격자 "못 봤다"
침묵 연대 속 43년째 미해결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총 여덟 발의 총알이 그의 뒤통수를 겨눴다. 그중 두 발이 켄 렉스 맥엘로이(47)의 목과 머리를 명중했다. 1981년 7월 10일, 자신보다 스물세 살이나 어린 아내(24)와 동네 주점에서 오전부터 술을 마신 뒤 트럭 운전대를 잡았던 그의 마지막이었다. 대낮에 벌어진 명백한 '살인 사건'이었다.

주점 인근에 모여있던 주민들은 총격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어림잡아도 60여 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추후 경찰 조사에서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핸들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시신과 유리 파편, 조수석에 앉아 겁에 질린 채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 아내 트레나 맥클라우드만이 숨 막혔던 현장을 대변했다. 목격자는 있지만 목격한 사람도, 처벌받은 사람도 없는 43년 전 여름 날 '이상한 살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방화, 성폭행... 스키드모어를 유린한 폭군

미국 미주리주(州) 동북부의 스키드모어. 전체 인구가 450명에 불과했던 이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협박부터 절도, 폭행, 방화, 스토킹, 미성년자 성폭행까지. 온갖 무자비한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범의 심판을 피해 간 한 남성 때문이다.

켄 맥엘로이. 키 182㎝에 몸무게가 120㎏에 육박하던 그는 늘 옆구리에 총을 차고 마을을 휘저었다. 그는 스키드모어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주민들의 인권을 멋대로 유린하는 무법자였다. 스키드모어의 한 주민은 맥엘로이를 "누구라도 자신을 거스르면 뒤쫓아가 그의 집을 불태우고 총을 휘둘렀던 폭군"이라고 표현했다.

맥엘로이는 1934년 스키드모어의 가난한 소작농 부부 사이에서 열여섯 남매 중 열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15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이웃의 가축이나 곡물 등을 훔치며 살았다. 그는 소아성애자였다. 맥엘로이는 자신이 35세 때 12세에 불과했던 어린 소녀를 스토킹하고 수차례 성폭행까지 했다. 그녀가 바로 맥엘로이의 마지막 부인 트레나다.

트레나는 14세에 맥엘로이의 아이를 임신했다. 맥엘로이는 강간 혐의를 피하기 위해 당시 부인과 이혼 후 트레나와 결혼을 강행했다. 트레나 부모가 항의하자 아예 트레나 가족의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아이를 낳은 뒤 가족의 집으로 도망친 트레나를 다시 뒤쫓아가 끌고 왔다.

사춘기 소녀들을 구타하고 협박해 복종시키는 방식으로 맥엘로이는 생전 5명의 아내를 뒀다. 이 여성들은 맥엘로이가 무엇을 하든 항상 그를 따랐다. 미국의 범죄 심리 전문가 마이클 스톤 컬럼비아 의대 교수는 저서 '범죄의 해부학'에서 "학대받은 사람이 학대를 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에게 충성하는 '스톡홀름 증후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이 낳은 자녀만 16~19명에 달했다.


법 위에서 놀던 무법자... 잠깐의 평화

맥엘로이는 범행을 멈추지 않았다. 1976년 7월 그는 로메인 헨리라는 동네 농부와 시비가 붙어 그에게 두 차례 총을 쐈다. 헨리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맥엘로이는 체포됐다. 그런데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범행 당일로 지목된 날짜와 시간에 "맥엘로이와 함께 너구리 사냥 중"이었다며 맥엘로이의 거짓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증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기세등등해진 맥엘로이는 머지않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각종 범죄로 22차례나 체포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사히 풀려났다. 자신의 변호사 친구를 앞세워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간 결과다. 스키드모어 주민들은 맥엘로이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맥엘로이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주민들은 자리를 뜨기 바빴다.

1980년 어느 날이었다. 스키드모어의 유일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70대 보·로이스 바우웬캠프 부부는 가게에서 사탕을 훔치려 한 한 소녀를 나무랐다. 하필이면 소녀는 맥엘로이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 소식을 들은 맥엘로이는 분노했다. 엽총을 들고 슈퍼마켓을 찾아갔다. 곧바로 보 바우웬캠프 목에 총을 쐈다. 바우웬캠프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맥엘로이는 살인 미수로 기소됐다. 이듬해 맥엘로이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갇혔다. 생애 첫 유죄 판결이었다.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다.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로부터 해방된 시간이었다. 집에서 나와 자유롭게 식당도 가고 술집도 갔다. 가는 곳마다 맥엘로이가 있는지 여부부터 살폈던 주민들은 모처럼 자유롭게 동네를 활보했다. 마을에 활기가 감돌았다.


돌아온 범죄자... 한계치 다다른 주민

하지만 머지않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맥엘로이가 항소했다. 법원은 설상가상 그에게 보석 허가 결정을 내렸다. 6만 달러(약 8,000만 원)의 보석금을 내고 맥엘로이는 석방됐다. 잠깐의 평화도 스키드모어 주민들에겐 사치였을까. 그가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옆구리에 다시 총을 찼다. 주민들은 전보다 강한 적개심과 앙심을 품었다. 치를 떨었다. 스키드모어의 질서가 다시 무너질 것이 뻔했다.

1981년 7월 10일. 60여 명의 주민은 이른 아침부터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앞으로 맥엘로이의 악행에 대처할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들은 지역 보안관 대니 에스테스를 회의에 초대했고, 그는 "앞으로 지역 상황을 잘 감시하겠다"고 말했다.

대책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맥엘로이가 트럭을 몰고 시내 주점을 찾았다. 그는 맥주부터 찾았다. 아내 트레나는 그의 옆에서 탄산음료를 몇 모금 마셨다. 주점을 나온 맥엘로이는 트럭 운전석에 올랐다. 곧바로 총알이 날아와 트럭 창문을 뚫었다. 폭군의 마지막이었다. 회의를 마친 60여 명의 주민이 이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쓰러진 맥엘로이를 위해 구급차를 부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것도 못 봤다" 침묵의 유대

곧바로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단체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마을을 휘젓던 폭군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점을 고려할 때, 맥엘로이에 총을 겨눈 사람은 분명 주민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누가 총을 쐈는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맥엘로이에 세뇌당해온 트레나만이 경찰에 "누군가 계획한 범죄가 분명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주민 누구도 총격과 관련해 증언에 나서지 않았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미 뉴욕타임스는 "주민이 고작 400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은 총을 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성난 군중은 이 불량배 총격 사건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침묵의 유대"(1981년 7월 17일 자)라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불합리한' 사법 체계에 환멸을 느껴온 주민들이 직접 나서 범죄자와 법에 맞서 보복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수사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맥엘로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약 1년 만에 수사를 종결했다. 체포한 사람도, 기소한 사람도 없었다. 맥엘로이의 총을 맞았던 슈퍼마켓 주인의 아내 로이스 바우웬캠프는 "이제 마을에서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의가 실현된 것"이란 말만 남겼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수십 명의 목격자가 지켜본 대낮의 총격 사건 수사가 종결됐다"며 "이 친밀한 작은 마을 주민들은 그 어떤 후회도 없었다"(1982년 9월 2일 자)라고 썼다. 43년 전 '아무도 못 본' 살인 사건의 결말이었다.


조아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