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1913~1994)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로 영화는 시작한다. 닉슨 전 대통령은 “수십 년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사적으로 돈 한 푼 취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닉슨의 말은 반어법적으로 들린다. 영화 ‘어프렌티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인물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사업가 출신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세간의 의심과 평가가 맞다면 문제적 인간 트럼프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에게 다시 미국 대통령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겨도 되는 걸까.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어프렌티스'는 비정한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되짚으며 그의 어두운 내면이 형성된 과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올해 칸영화제 열기의 3할 정도를 차지한다 해도 될 뜨거운 화제작이다. 23일 오전(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도시 칸의 영화관 시네움에서 '어프렌티스'를 봤다. 상영 시간이 오전 9시였는데도 300석가량이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어프렌티스'는 지난 20일 열린 칸영화제 공식 상영회에서 8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
1970년대 트럼프(서배스천 스탠)는 야심만만한 20대 젊은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했다. 운명적 만남이 훗날 세계를 뒤흔들 트럼프를 만들게 된다. 변호사 로이 쿤(제레미 스트롱)과의 인연이다. 쿤은 한 사교 클럽에서 만난 트럼프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는 트럼프 집안의 부동산 관련 법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후 쿤은 트럼프의 멘토를 자처하고, 트럼프는 그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다. 쿤에게 트럼프는 '수습직원(Apprentice)'인 셈이다('어프렌티스'는 트럼프가 진행한 유명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하다). 쿤은 트럼프에게 아버지 또는 큰형 같은 존재이면서도 절친한 친구가 된다. 쿤은 트럼프에게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공격하고 공격하고 또 공격할 것' '(불리한) 모든 걸 부인할 것' '패배를 절대 인정하지 말 것'이다.
트럼프는 성공 시대를 연다. 쿤의 조언이 디딤돌이 된다. 운과 시대가 그의 편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무모한 부동산 사업은 퇴락한 뉴욕 도심을 되살리려는 시의 계획과 맞물려 성공으로 이어진다. 도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 정책 덕을 보기도 한다.
영화는 성공 과정에서 트럼프의 어둠을 짚는다. 트럼프는 거부가 되면서 조금씩 안하무인이 된다. 아버지 프레데릭을 무시하게 되고, 알코올 중독 형을 낙오자로 여긴다. 조금씩 힘을 잃어가는 쿤을 하대하기도 한다. 장미 꽃송이 수백 송이로 구애해 웨딩 마치를 울린 첫 아내 이바나(마리아 바칼로바)에게는 "이젠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며 무례하게 말하기도 한다. 고급 정장을 선물했던 쿤에게는 싸구려 커프스버튼을 고급스럽게 포장해 건넨다. 그는 건방과 오만을 솔직함으로 착각한다. 쿤의 영향으로 세상 사람을 '킬러'와 '루저'로만 양분해 보았기에 그렇다.
인화성 강한 장면이 많다. 쿤이 검사의 사생활을 약점 잡아 트럼프 집안의 사업을 도와주는 모습, 트럼프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아내 이바나를 성폭행하는 대목, 트럼프가 범죄 집단의 협박에 굴복해 부동산 건설 이익 일부를 떼어 주기로 약속하는 모습, 사무실에서 젊은 여인과 성행위하는 장면 등이 파란을 부를 만하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건 트럼프의 부도덕하고 염치 없으며 비정한 면모다. "그는 수치심을 모른다(Donald has no shame)"는 이바나의 대사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트럼프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평가는 여러 경로로 많이 나왔으나 극영화를 통해 묘사하는 것은 '어프렌티스'가 처음이다. 영화는 젊은 트럼프를 통해 1970~198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들추기도 한다.
세계 영화계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이란 감독 알리 아바시가 메가폰을 잡았다. 아바시 감독은 이란 국적을 지녔으나 덴마크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 덴마크국립영화학교에서 공부했고, 장편데뷔작 '살리'(2016)부터 계속 덴마크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영화 '경계선'(2019)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거미'(2022)가 칸영화제 여자배우상을 수상하며 칸이 사랑하는 신예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어프렌티스'는 덴마크와 아일랜드 합작 영화로 아바시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아바시 감독은 이란에서 태어나고 이란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나 이란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다.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는 영화다. 연쇄 살인마가 매춘부를 죽였다는 이유로 영웅으로 간주되고, 가벼운 처벌을 받는 과정을 그렸다. 이슬람에 짓눌린 이란 사회의 부조리를 서늘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아바시 감독은 모국을 겨눴던 비판의 칼날을 미국 최고 권력자가 다시 될 가능성이 큰 인물에게 돌린 것이다.
아바시 감독은 지난 21일 열린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좋아할지 싫어할지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으나 그가 분명히 놀라기는 할 것"이라며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9월 중순쯤 미국 극장에서 개봉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아바시 감독은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이 소송 방침을 밝힌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소송을 많이 말하나 그의 승소 비율에 대해선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소는 각오했고 재판 결과를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