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지방법원. 난소암에 걸린 여성 22명이 다국적 제약회사 존슨앤존슨(J&J)사를 상대로 건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열렸다. J&J사 베이비파우더의 석면 성분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게 원고 측 주장. J&J사는 막강한 변호인단과 회사 안팎 전문가들, 제품 원료와 공정, 복잡한 성분 자료 등을 근거로 해당 제품과 암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주요 원료인 탈크(Talc, 활석)는 화장품과 의약품 등에 널리 쓰이는 천연광물로 인체에 무해하다. 문제는 탈크가 채굴되는 광맥(사문암층)이 석면의 광맥과 대체로 겹친다는 것. 2016년 첫 피해자 소송 이래 2차례 패소-항소한 J&J사는 저 대규모 집단소송에 배수진을 쳤다.
브라운대 가정의학과 교수 데이비드 어길먼(David Egilman)이 원고 측 전문가 증인으로 재판에 참가했다. 그는 원고들의 제품 사용 빈도와 기간, 활석 샘플 분석 자료를 근거로 해당 물질에 장기간 노출되면 난소암 발병 위험이 2배 가량 높아진다고 증언했다. 제품에 석면이 들어 있지 않다는 J&J사 주장에 대해 그는 직접 분석한 검출 데이터를 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측 주장은 욕실 저울에 바늘을 얹은 뒤 0g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사측 분석이 부실했거나 사실을 은폐하려는 수작이라는 거였다. 그와 연구원들은 소송 과정에서 공개된 회사 문건을 샅샅이 뒤져 사측이 석면 오염 가능성을 1970년대부터 알고도 은폐하려 한 사실까지 폭로했다.
그는 과학자이자 설득력 있는 증인인 동시에 집요한 수사관이고 재판의 전략가였다. 원고 측 변호사인 마크 레이니어(W. Mark Lanier)는 그를 "기업 부정에 관한 한 마약탐지견 같은 후각을 지닌 블러드하운드(bloodhound, 사냥견종)"이자 "게임체인저"라 평했다.
6주 공방 끝에 배심원단은 J&J사에 당시 생존한 여성 16명과 사망자 6명의 유족에게, 주 사법 역사상 최고액인 46억 9,0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패소 후에도 자사 제품의 석면 함유 사실을 부정하던 J&J사는 2020년 미국과 캐나다의 모든 소매점 진열대에서 탈크 제품을 옥수수전분 제품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나머지 국가 소비자들은, 아마도 재고가 소진된 2022년 말까지 석면 제품을 썼다. 2018년 패소 이후 5만여 건의 연쇄 소송 사태에 직면한 J&J사는 2024년 5월 1일 64억 7,500만 달러로 모든 소송을 멈추자는 일괄 합의안을 원고 측변호인단에 제시했다.
어길먼은 교수-의사라는 공식 직함보다 전문가 증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8년 소송 공판에서 그는 “의사는 한 번에 암 환자 한 명을 치료할 수 있지만, 재판에서는 수백만 명을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말했다. 근년의 마약성 진통제 '옥시코돈' 소송까지 600여 차례 법정에 서서 기업, 특히 다국적 제약회사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며, 자본주의적 정의와 책임, 소비자(피해자) 보호에 기여한 데이비드 어길먼이 별세했다. 향년 71세.
어길먼은 80년 중반부터 많게는 한 해 15차례씩 법정에 섰다. 그의 싸움은 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방불케 했다. 2000년대 초 탁월한 약효로 호평 받던 항염진통제 바이옥스(Vioxx)를 만든 다국적 제약회사 머크(Merck)사를 상대로 한 2005년 첫 소송의 게임체인저도 그였다. 그는 머크사가 심장마비 등 심각한 심혈관계 부작용을 알고도 식품의약국(FDA) 심사 과정에 그 사실을 은폐한 사실을 회사 내부문건 등을 통해 밝혀냈다. 머크사는 2002년에야 부작용 위험성을 제품 라벨에 명기했고, 2004년 9월 약 전량을 자진 수거했다. 1999년 시판 후 5년 간 바이옥스는 1억만 건 넘게 처방돼, FDA 추정에 따르면 약 8만8,000~13만9,000건의 심장마비를 유발시켰다. 바이옥스 복용 후 심장마비로 사망한 56세 남성의 유족을 대리한 2005년 소송에서 배심원단은 배상금 2,440만 달러 외에 2억 5,300만 달러 징벌적 배상액을 지급하라고 평결했다. 사측은 이후 이어진 2만7,000여 건의 소송을 48억 5,000만 달러 합의금으로 덮었다.
석면 관련 재판에서 1,000번 넘게 증언대에 섰던 화학공학자 겸 보건환경 전문가 배리 캐슬먼(Barry Castleman)은 2019년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재판 과정에서 상대측 증인 흠집내기가 얼마나 집요하고 위협적인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들(피고측 변호인단)은 당신의 모든 과거, 당신이 쓰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들을 펼쳐 놓고 거기서 오류와 모호함, 불일치 사례를 찾아내 당신 얼굴에 던진다”고 말한 바 있다.
어길먼은 법정 증언 대가로만 평생 500만 달러 넘게 벌어 자신을 도운 연구원들 급여 등으로 쓰고 일부는 피해자 공익단체에 기부했다. 사측 변호인단은 어길먼을 ‘직업적 증인’이라 규정하며 그의 중립성을 주로 공격했다. 그를 상대한 한 변호사는 “그는 증언을 요청 받으면 뭐든지 응할 사람”이라고 말했고, “(목적을 위해) 과학을 한계점까지 잡아 늘이는(…) 위험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여러 소송에서 어길먼과 함께 일한 필라델피아 드렉셀(Drexel)대 환경직업보건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Frank)는 “어길먼은 자기 견해에 매우 완고하고 공중보건의 정치적 측면에 주목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과학이 잘못된 예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머크사 소송을 함께 했던 예일대 심장의학자 할런 크룸홀츠(Harlan Krumholz)는 “그는 솔직하고 권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무척 영민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자 헌신한 사람”이라며 “주류 학계 바깥에 있으면서도 학계와 의사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어길먼은 “내가 공중보건의 편이란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 의견이 결코 과학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내 상대는 무한한 자원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집단들이다. 내가 선을 넘는 순간 그들은 내 두 다리를 잘라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선’을 넘은 적도 있었다. 거대 제약사 일라이 릴리(Eli Lilly)사의 정신질환 치료제 '자이프렉사(Zyprexa)'로 인해 당뇨병 등을 앓게 됐다며 다수가 제기한 2007년 소송에서 어길먼은 사내 문건 등을 추적해 회사측이 약의 부작용을 은폐한 사실을 찾아냈다. 재판부는 회사 영업 및 마케팅 전략 보호 차원에서 해당 문서의 유출을 금지했다. 어길먼은 변호사를 통해 그 문건을 뉴욕타임스에 제보했고, 법원 명령을 어긴 데 따른 형사 고발을 면하기 위해 사측에 합의금 1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보도 직후 미국 30개 주 정부가 일라이 릴리사에 관련 문서 공개를 요구해 진실을 확인했고, 2009년 사측은 잇따른 피해자 소송 합의금으로 14억 달러를 써야 했다. 증언 수당보다 훨씬 많은 돈을 잃었을 어길먼은 NYT 인터뷰에서 “내과의사 선서에 입을 다물라는 말은 없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S. 어길먼은 1952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유대인 제화공 아버지가 나치 수용소에서 부인과 두 아이를 잃고 미국에 건너온 뒤 재혼해 낳은 아이가 그였다. 10세 무렵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아버지는 거의 폐인이 됐고 어길먼은 학교 교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브라운대 장학생으로 분자생물학(1974)과 의학(78) 학사 학위를 받고 82년 하버드 의대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국립보건원(NIH)과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소(NIOSH)에서 일했고, 미국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AFL-CIO)의 근로자클리닉도 설립해 운영했다.
84년 자동차 외장 도료에 포함된 이소시아네이트(isocyanate)의 폐 손상 관련성을 증언한 게 그의 첫 법정 증언이었다. 그해 인도 보팔 화학공장 폭발로 최소 3,700여 명의 목숨을 앗은 그 물질이었다. 앞서 그는 이소시아네이트의 건강 유해성 평가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 그는 85년 매사추세츠로 돌아와 브라운대에서 강의하며 재판 증인으로 본격 나섰다. 당시는 석면 관련 소송이 잇따르던 때였다. 그는 증언 준비와 직업병, 환경보건 상담 등을 위한 별도 법인 ‘Never Again Consulting’을 설립했다. 지역 고교생 다수가 그의 연구원이었다. 2018년 경기 중 부상을 입고 숨진 텍사스대 풋불 선수 유족을 위한 재판에서 그는 전미대학체육협회(NCAA)가 풋볼 선수의 뇌진탕 등 위험을 알면서 수십 년 간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거나 보호 조치를 등한시한 점을 부각, 200만 달러 합의금을 받아냈다. 2019년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그는 “봤죠? 나는 갓 스무 살 된 아이들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을 때려눕혔어요”라고 자랑했다.
그는 60년대 미 국방부 자금을 받아 신시내티대학이 진행한 비인도적 인체 방사선 실험 자료 공개 요구에도 앞장섰다. 방사선의 군사적 활용도와 암 치료 효율성을 연구하기 위해 당시 연구진은 저학력자와 뇌기능 장애 등 기저질환자를 주로 모집해 치사량에 가까운 방사선을 조사했다. 피실험자 88명 중 62명이 흑인이었다. 국방부와 연구자들은 치료 불능 말기암 환자들에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속여 최소 8명을 방사능 중독으로 숨지게 하는 등 모두 20명을 희생시켰다. 그는 94년 미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했고, 연방정부는 96년에야 저 실험에 대해 공식 사죄했다.
70년대 석면파동 이후에도 캐나다는 2010년대까지 약 40년 간 석면의 일종인 크리소타일(Chrysotile) 석면의 인체 무해성을 역설하며 수출에 열을 올렸다. 연방 총리까지 광산업계를 두둔했고 맥길대 연구진도 다수의 논문으로 무해성을 보증했다. '크리소타일은 괜찮다'는 이른바 ‘ABC(anything but chrysotile) 신화’에 가장 먼저 또 맹렬히 대든 게 어길먼이었다. 2012년 캐나다 공영방송 CBC 인터뷰에서 맥길대 핵심 연구자는 크리소타일 분석 데이터를 어길먼 박사에게 공개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며 “과학자가 아닌 사회비평가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 연구자는 방송사에도 해당 자료를 제공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당시에도 세계보건기구(WHO)는 “모든 종류의 석면은 석면폐증과 중피종 폐암을 유발하며 안전한 노출기준치라는 건 없다”고 밝혔다. ABC신화가 허물어진 2013년 어길먼은 맥길대 초청 강연에서 일류 과학자들이 어떻게 과학을 왜곡해 자본과 국가권력에 부역했는지 그 대학 학생과 연구자들에게 강의했다. 2014년 그는 석면의 진실과 정의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어빙 셀리코프 상(Irving Selikoff Award)을 받았다.
미국 제약업계는 홍보비용으로 월 평균 10억 달러(2022년 말 기준)를 쓰고, 의회- 정부 로비에 2024년 기준 3억 7,859만 달러(건강기능식품 포함)를 사용, 전 산업을 통틀어 단연 1위를 기록했다.
제약사들은 전문의약품 개발 기초연구 단계에서 막대한 공공자금을 지원받고 세금 감면 혜택까지 누리지만 의약품 값은 "신약 개발비용"을 명분삼아 매년 큰 폭으로 인상해왔다. 당뇨병 환자들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는 인슐린 가격은 2008~18년 사이 3배 가량 올랐다.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유통기한이 지난 인슐린을 쓰거나 의사가 처방한 것보다 적은 양을 투여받는 등 필사적인 방법으로 버티다 숨지는 사태도 이어져왔다.
제약사들이 신약 독점권을 연장하기 위해 특허 만료일 직전 약 디자인 등 사소한 특징을 변경해 새로 특허를 받는 이른바 ‘에버그리닝(evergreening)’도 예사로 이뤄진다. 2008~18년 신약 특허의 78%가 이미 존재하던 약품에 대한 특허였고, 특허를 2차례 이상 연장한 예도 50%에 달했다. 그 이익은 제약사 주주와 경영진, 로비 대상 정치인들이 차지하고 일부는 신약 홍보 및 부작용 은폐에 동조한 이른바 ‘용병 과학자(mercenary scientists)’들에게 돌아간다.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환자)의 몫이다. 미국 시민의 의사 처방약 지출 비용은 2010~18년 사이 50% 늘어났고, 빅파마(대형 제약사)의 주력 제품 가격은 최고 71%나 올랐다. 약값 인하를 공약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행정부 내 최소 1,662개 주요 보직에 대형 제약사 출신 또는 이해관계자를 임명했다. 첫 보건부장관부터 빅파마의 오랜 후원을 받아온 톰 프라이스 전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다량의 헬스케어 주식 거래로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제약업체 길리어드(Gilead)의 한 로비스트(Joe Grogan)는 예산관리처 요직에 임명됐다.
기업의 과학 오염 실태 등을 고발하는 '국제 직업 및 환경보건 저널' 편집자로도 일했던 어길먼은 여러 소송 과정에서 확인한 제약업계와 용병 과학자들의 논문 ‘고스트라이팅(ghostwirting)’과 '시딩(seeding)' 사례 및 수법들을 2008년 ‘JAMA’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고스트라이팅이란 논문은 제약회사 홍보팀에서 작성하고 주요저자 이름만 외부 과학자로 기재하는 수법. 어길먼은 ‘저자를 누구로 내세우면 좋겠느냐’ ‘박사 저자 미정’ 등의 사측 기록과 이메일을 근거로 제시했다. 시딩은 FDA 심사 전이나 도중에 우호적인 의사집단을 동원해 임상 연구를 설계-조작함으로써 신약을 홍보하고 FDA 승인을 앞당기는 수법. 머크사 내부자 메모에는 “시딩 연구일 수 있지만, 우리끼린 그렇게 부르지 말자”는 문구가 있었다.
2004년 7월 미국 보건-영양 소비자 권익단체인 ‘공익과학센터’가 주최한 ‘돈과 과학의 이해 상충(Conflicted $cience)’ 컨퍼런스에서 어길먼은 “과학에 대한 억압은 돈의 논리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현상으로, 문제는 몇 개의 썩은 사과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처럼 부정하게 얻은 이익이 들켜서 부담해야 할 비용을 압도하는 한, 리더가 형사처벌의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윤리적 기업이 비윤리적 기업과 경쟁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