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커다란 하나의 대륙이지만 그 속을 경험하면 할수록 국가나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도 서로 다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술 분야도 지역마다 달라서 이탈리아는 오페라와 르네상스 건축, 독일은 고전음악과 바로크 양식, 오스트리아는 세기말적 낭만주의와 로코코, 영국은 뮤지컬과 현대미술이 강세다. 그중에서도 예술의 나라 하면 제일 먼저 프랑스가 떠오른다. 특히 근현대미술 분야는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전시 공간인 루브르박물관은 기원전부터 근대 이전까지, 오르세미술관은 근대, 퐁피두센터는 현대의 예술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한다. 미술관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현실화된 유토피아) 공간이면서 복합적 문화의 장으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새로운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전시 공간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프랑스에는 1980년대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한 지역현대미술기금으로 운영하는 미술관 '프락(Frac·Fonds régionaux d`art contemporain)'이 생겨났다. 기존 미술관이 파리를 중심으로 중앙정부나 기업 소유의 독자적인 조직과 공간으로 생겼다면 프락은 지역 문화 사무국을 설립하고 각 지방정부와 지방 자치제를 기반으로 하며 다수의 미술관 네트워크 체제로 연결되는 새로운 전시 공간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프락은 현재 프랑스 전 지역에 스물세 곳의 미술관과 뛰어난 작가들 그리고 다양한 현대 작품을 보유하며, 전국적 네트워크인 플랫폼을 갖췄다. 현대미술의 생산, 순환, 소비를 목적으로 현대 예술 창작 활동 지원, 현대 예술 작품을 미래의 유산으로 확보, 지역과의 연계를 통한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 개발, 지역 상호 간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 등을 목표로 한다. 특히 창작 활동 지원과 문화적 접근이 어려운 지역의 전시 활성화를 위해 각 미술관은 도시 중심이나 외곽 등에 다양하게 분포하며 미술관 건축은 기존의 도시 공간을 리모델링하거나 새로운 공간을 덧대기도 한다.
프락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프락 그랑 라주는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됭케르크에 위치한다. 미술관을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안 라카통과 장필리프 바살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활동하면서 극단적인 기후 조건 환경과 상황에 맞는 건축을 연구했다. 연구와 도시 계획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경제적인 건축 재료를 이용해 가설물과 같은 건축을 시도한다. 기존 유럽 건축의 내부 지향적 공간 구성과 다른 가벼움과 투명성의 건축을 바탕으로 한 구조를 만들어 새로운 현대적 건축공간을 구현한다. 이곳 프락은 거대한 조선소 공간에 똑같은 규모의 공간을 만드는 더블링 방식으로 전시 공간을 확보하고 내부 공간 전체를 비워 건축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건축적 특징은 가벼운 건축 재료와 최소한의 벽체를 이용한 공간에서 드러난다. 내·외부 중정을 만들어 다양한 내부 동선과 시각적인 확장을 제공한다. 넓고 푸른 해변에서부터 미술관 입구까지 놓인 공중다리를 걸어서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동안 거대한 전시 공간에 놓인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건축사무소 제이콥과 맥팔레인은 파리 남쪽 도시 오를레앙에 프락 상트르를 선보였다. 이곳 프락은 이전에 육군 기지였던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새롭게 증축한 전시 공간은 난류(The turbulences)처럼 생긴 역동적 구조물이다. 건축가와 여러 예술가가 협력해 설계한 전시 공간은 기존 건물의 구성 원리인 격자 문양을 확장해 개발한 독특한 디자인의 조형물이다. 비정형 형태의 '파라메트릭 디자인' 원리를 기반으로 한 최첨단 설계 방식으로 탄생했는데 프락 건립의 특징인 실험 정신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곳은 현대미술과 실험적 건축을 결합한 방식의 개발을 통해 '창작을 지원하고 대중의 인식을 장려하며 영향력 있고 진보적인 프로젝트의 개발을 지원한다'는 프락의 목표를 달성했다.
프랑스 중부지역의 작은 도시 브장송에는 도심을 관통해 흐르는 강의 강변 한쪽에 일본 현대 건축가 구마 겐코가 설계한 프락이 있다. 프랑스 전국의 프락 중 여섯 곳을 새로 신축했는데 그중 브장송과 마르세유의 프락을 구마가 설계했다. 건축가는 작은 단위 유닛을 조합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는 '복잡계건축'을 이용한 독특한 설계 방식으로 두 곳을 디자인했다. 이곳은 음악원과 프락 전시 공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 건축물 규모가 상당히 큰데, 잘게 쪼개진 사각형의 파편화된 판을 픽셀로 만들고 그물처럼 엮어서 건축물 전체를 감싸는 외피로 좌·우 문화 공간을 하나로 만들었다. 프락 프랑시 콩테는 입면의 유동성, 지붕의 독창성, 자연 및 도시 환경에 배치 등 디자인 측면뿐만 아니라 환경 및 에너지 절약 관점에서도 뛰어나서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 프랑스 프락과 같은 시스템은 아니지만 고려할 만한 미술관 조직이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하나의 대형 미술관이 아니라 서울시 도심부 정동의 주 미술관을 중심으로 북서울 분관, 서서울 분관, 남서울 분관, 미술 아카이브, 사진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 백남준 미술관, 벙커, 창고 등 서울 전역에 나누어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거대한 하나의 조직을 다수의 별도 공간으로 나눠 관리하기에 각 미술관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인 프락과는 다르지만 다양한 기능적 네트워크로 구성된다는 점은 비교할 만하다. 그중 최근 개관한 서울시립 미술 아카이브는 평창동에 흩어져 있는 작가 아틀리에와 갤러리, 지역 미술 관련 시설의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미술 문화 자료를 수집, 연구, 전시하는 시설이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성격의 미술문화복합공간이다. 이곳은 누구나 어디에서든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동선을 만들고 주 출입구을 없앤 탈중심성 개념의 전시 공간이면서 미술관 조직 내 아카이브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의 성공 이후 유명 미술관은 경쟁하듯 전 세계에 분관을 내기 시작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은 이탈리아 베니스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루브르 박물관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퐁피두 센터는 스페인 말라가와 프랑스 메스에 이어 2025년에는 서울에 분관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유명 미술관의 분관은 원본의 아우라를 상업화한다는 의심을 들게 하는데 프락은 이와는 다른 대중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프락은 다수의 미술관 네트워크를 이용한 공유형 통합으로 미술의 생산과 소비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류와 활동을 위한 창구 역할을 하며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예술 조직이다. 각 프락은 지역적 특수성, 소장 작품의 차별성, 건축물의 상징성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며 각 지역의 현대미술 작품의 생산, 소장품의 순환, 네트워크를 이용한 상호 전시를 통한 소비 등 지방 미술 시장을 예술 통치 시스템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후기 자본주의의 끝에서 우리는 이제 경제적 수익에 가려진 예술의 가치를 찾아 나설 때가 됐다. 프랑스의 프락은 그 선두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