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화사업·강제프락치 피해자들 국가 상대 소송 1심 승소

입력
2024.05.2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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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프락치 활동 강요·고문 등
피해자에 3000만~8000만 원 배상

군사정권 시절 녹화사업(학생운동 전력자를 강제 입대시켜 정보원 활동을 강요하는 것)에 강제 동원되거나 프락치(신분을 숨긴 비밀 정보원)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1심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부장 황순현)는 22일 녹화사업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피해 정도에 따라 3,000만 원부터 8,000만 원까지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같은 법원 민사합의36부(부장 최규연)도 이날 비슷한 피해를 당한 다른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다만 법정에서 정확한 배상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다.

해당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징집을 당하거나 녹화사업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다. 군사정권은 이들에게 학내 간첩과 북한 찬양자를 조사하는 프락치로 활동할 것을 강요했고, 이 과정에서 고문하고 폭행하는 등 가혹행위를 가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22년 이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지난해 5월 100여 명의 피해자들을 모아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은 14개 소송을 진행 중이고, 이날 법원의 첫 판단이 나온 것이다.

민변은 선고 직후 피해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의 사과를 촉구했다. 피해 당사자인 남철희씨는 "국가가 학생들을 입건하고 다른 사건에 연루시켜 빨갱이로 몰아 (사회에서) 매장하려고 했다"면서 "(그런데도) 국가로부터 사과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국가 측은 준비서면 등을 통해 "불법행위에 대한 입증이 부족해 (손해배상 청구는) 모두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이영기 변호사는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에 이어 사법적 정의를 확인한 중요한 판결"이라며 "피해자가 많은데도 진실규명 신청자가 적으니 입법을 통해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문을 통해 배상 액수를 밝히지 않은 재판부에 대해선 "불친절하게 금액도 말하지 않고 '판결문을 보고 확인하라'고 했는데, 이는 국민에 대한 자세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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