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명의 유생이 서명했다는 만인소가 올라오니까 처음엔 화들짝 놀라죠.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긴장하고 최소한 눈치는 봅니다. 뭐라도 설명하고 응답을 하죠.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안 들어요. 1855년 만인소 때 임금이 철종이었는데, 만인소에 대한 대답이 딱 그거예요. '어 그래 잘 알았다, 끝.' 소통의 문이 그렇게 닫히면서 조선이 망한 겁니다."
너도나도 '불통'을 말하는 시대,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푸른역사 발행)를 내놓은 이상호(54)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을 지난 20일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이 책은 영남 만인소(萬人疏) 사건, 그러니까 1792년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사도세자 복권 등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정조에게 올린 사건의 전말을 다뤘다.
"다른 건 몰라도 단일 사건에 현미경을 들이댄, 확대율만큼은 최고의 책이라 자부한다"는 스스로의 평가처럼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 간단한 문장 뒤에 숨은 복잡한 사정을, 한 달간 벌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상소가 발의되고, 의견을 한데 모으고, 대표단이 닷새간의 속도전 끝에 한양에 도착하고, 대표단 우두머리인 '소두(疏頭)'를 뽑고, 회의를 거듭하며 합의하에 상소 문구를 만들고, 종이를 구하고 자금을 빌리고, 상소 반입을 훼방 놓거나 상소 운동 진영의 분열을 꾀하는 집권 노론 세력의 노련한 방해공작을 뚫고, 마침내 상소문을 받아 든 정조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어 버리는 과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여론으로 움직인다면 조선시대엔 '공론(公論)'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 공론이 어떻게 생산 유통되는지 그 단계별 절차를 눈앞에 정밀하게 그려 보여 준다.
만인소는 1792년을 포함, 모두 7차례 진행됐고 실물이 남아 있는 건 1855년, 1884년 만인소 두 가지다. 만인소는 상소문 아래에다 1만 명의 서명을 붙인 문건이니 길이만 100m가 넘는 두루마리이고, 돌돌 말면 무게만도 10㎏이 훌쩍 넘는다.
한번 삐끗하면 이단이니 사문난적이니 해서 제 한 목숨 날아갈 수도 있는데, 이런 엄청난 상소 운동이 일어났다? 이 연구위원은 "운동 자체도 대단하지만, 상소 과정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절차적 정당성이 너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의 원형이 이미 1792년에 나타났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점을 내세워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도 등재됐다.
경북 안동에 자리 잡은 국학진흥원은 조선시대 민간에서 쓴 일기, 편지 등을 수집해왔다. "편하게 말하자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각종 동네 기록들을 모은 건데, 이게 어느덧 64만여 점 이상이 되면서 있는 자료를 열심히 읽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보물창고 같은 것이 됐어요." 이번 책도 만인소 운동에 참여한 류이좌(1763~1837)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천휘록' 등 5개의 일기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안동 지역 특성상 지역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데 "10년 동안 해도 소재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라며 웃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묵히기 아까워" 출판사 푸른역사와 손잡고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를 시작했다. 첫 권은 경남 함안의 살인 사건을 다룬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이었고 만인소를 다룬 게 두 번째 책이다. 세곡선 난파 사건, 묫자리 두고 싸우는 투장 사건 등 책 쓸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만인소만 해도 1792년 만인소 이후 노론은 안동향교 등을 장악해 만인소 원천봉쇄 작업을 벌이는데 이로 인해 벌어지는 '향전(鄕戰)' 등 뒷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 시대 7차례 만인소는 왜 하필 영남에서 일어났을까. 가장 중요한 건 사상이었다. "퇴계학의 강한 영향력입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공부를 했으면 세상에 기여하라는 겁니다. 그 열망이 엄청났던 곳이 바로 영남입니다." 길게 보면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의 에너지는 조선이 망한 뒤 항일의병 운동으로 가닿았다. "만인소 운동에서 가장 음미해 볼 지점"이라 평가했다.
여기에선 '보수 TK(대구·경북)'의 뿌리도 확인할 수 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영남 남인의 과거길을 막았다. 1792년 만인소는 "오랜 야당 생활로 인한 영남 남인들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겪으면서 지역 어르신들이 반은 농담조로 '300년 야당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집권했다'는 얘기를 하시기도 했어요." 대한민국 보수의 성지는 그렇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