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럽과 다르다’고 말하기를 권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비서실장을 지낸 프레드 플라이츠(62)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FPI) 미국안보센터 부소장이 지난 15일(현지시간)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한 조언이다. 미국에 자국 안보 비용을 의존한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특히 문제 삼고 있는 나라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유럽 회원국들이므로, 그들과 차별화하면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의 과도한 증액 요구 탓에 치렀던 곤욕을 이번에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주한미군 철수가 검토될 개연성이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 외교 재개도 서두를 것으로 내다봤다. 북한에 의한 한반도 긴장 고조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실책이 부른 결과이며, 대화 복원으로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래리 커들로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키스 켈로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대행 등 1기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료들이 대거 들어와 있는 AFPI는 ‘트럼프 싱크탱크’라 불릴 정도로 연구소가 내놓는 정책과 트럼프 전 대통령 공약 및 유세 발언 간의 공명도가 높다.
플라이츠 부소장도 트럼프 2기가 현실화하면 안보 요직에 발탁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지난 9일 출간된 AFPI 정책집 ‘미국 안보에 대한 미국 우선주의 접근법’의 편집 작업을 그가 총괄했다. 올 3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플로리다주(州) 마러라고 자택에서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를 만났을 때 배석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자신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대변하지는 않는다고 몇 차례 말했다.
인터뷰는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AFPI에서 한 시간가량 진행됐다.
2026년부터 적용될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정 협상이 지난달 개시됐다. 미국 대선은 11월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도 실현 가능한 미래다. 경제력이 충분한 동맹국이 자국 방위 비용을 미국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줄곧 주장해 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명확히 언급한 적은 없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그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협상이 내년으로 넘어가거나, 연내 타결되더라도 백악관을 탈환한 트럼프 전 대통령 마음에 결과가 흡족하지 않을 수 있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 때문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문할 가능성이 있을까.
“그(철수) 가능성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트럼프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는 동맹이 있다면 나토다. 몇몇 회원국, 특히 프랑스와 독일이 제 몫의 방위비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2% 이상’은 의무다. 게다가 그들은 우크라이나가 (자국을 침공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데 드는 비용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 압박의 초점은 그들에 맞춰질 것이다. 아시아가 아니다.”
-미군을 더는 한반도에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공화당 측 전략가도 있다.
“말도 안 되는(ridiculous) 소리다. 미국 역사를 잘 안다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랐다. 트럼프 주변에 안보 전문가가 꽤 많고 진용도 탄탄한데, 아무도 그렇게 조언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안정화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이나 중국의) 공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미군과 한국군의 강력한 동맹 덕이다. (주한미군 철수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가정이다.”
주한미군 필요성의 인정은 AFPI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외교 참모로 참여했던 스티브 예이츠 AFPI 중국 정책 구상 의장은 정책집에서 “주한미군은 (미중 간) 전면 충돌이 일어났을 때 북한 김정은 정권을 자극해 한반도에 전선을 구축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핵심적”이라고 평가했다. 플라이츠 부소장은 “중국에 대한 트럼프의 우려는 엄청나게 강하다(extreme)”고 말했다.
-미군 주둔 비용 중 한국이 부담하는 몫이 나토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게 객관적 사실이다.
“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경우 방위비가 큰 쟁점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윤 대통령이 ‘중추 국가’로 발전시키고 있는 한국은 중국이 키운 역내 위기에 함께 대처할 나라가 필요한 미국에 최적 파트너다. 트럼프가 동맹과도 거래가 불가피하다는 식의 수사(deal-making rhetoric)를 많이 구사해 왔지만 그가 당선된다면 한국·일본은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좋을 것으로 본다. 특히 트럼프와 윤 대통령은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듯하다. 트럼프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양보만 갖고는 (북한과의)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데도 문 전 대통령이 그랬다. 윤 대통령과는 생산적 관계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트럼프의 주의를 끌 필요는 있다. 첫 만남 때 윤 대통령이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유럽과 다르다. 온당한 몫을 지불한다. 여기(한반도)는 미군 주둔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적다’고 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지난달 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뷰와 이달 중순 유세에서 ‘미국으로부터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해진 한국이 방위비는 적게 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3만 명에 못 미치는 규모도 4만 명이 넘는다고 부풀렸다. ‘돈을 더 받으려는 전략의 일부 아니냐’는 질문에 플라이츠 부소장은 확대해석을 단속했다. “그는 많은 이슈를 다뤄야 하는 정치인”이라며 “실언 목록이라면 바이든 대통령이 훨씬 길다”고 지적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재개될까.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장소는 하와이가 어떨까 싶다. 김정은은 먼 여행을 싫어한다. 다만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중 하나가 북한의 대(對)러시아 무기 제공 중단이다. 대통령(트럼프)에게 강력히 건의하려 한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 집단 학살 가담을 포기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감내해야 할 작은 대가다.”
-다른 전제 조건은?
“미사일 발사 시험 유예도 조건 중 하나다. 실제 2017년 말 시작된 북한의 미사일 시험 중단은 2019년까지 이어졌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2022년이 돼서야 재개했다. 대화를 원한다는 북한의 중요한 제스처가 될 것이다.”
-북한이 호응할지는 미지수 아닌가.
“일본과 한국에 여러 소식통이 있는데, 김정은이 또 다른(7차) 핵실험을 미루고 있는 것은 트럼프가 돌아와 대화가 재개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했다.”
-추가 개발 중단을 조건으로 미국과 거래해 제재를 풀고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게 북한의 목표라고 다수 전문가는 분석한다. 만만치 않은 협상이 될 게 분명하다. 얼마 전 바이든 행정부 당국자의 ‘중간 단계(interim steps)’ 언급이 비핵화 포기로 의심된 배경이기도 한데.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도 중간 단계와 관련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무진 수준이었고, 트럼프와 고위 참모들은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북한이 그럴 의사가 있을까.
“현재 북미 간에는 관계가 아예 끊긴 것으로 봐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자초한 일이다. 이 행정부가 파트타임 대북 특사를 임명했을 때 김정은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미사일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7차 핵실험 준비 조짐을 보였는데도 바이든 행정부는 줄곧 북한을 무시했다. 그러다 지난해 초 윤 대통령이 ‘자체 핵 보유’를 언급하자 그제야 백악관이 충격을 받고 관리들을 급파해 한국을 말렸다. 그 결과로 이어진 한미일 3국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는 분명 바이든의 공로다. 하지만 그 발전은 2년간의 (북한) 방치에 따른 반작용이었다.”
-바이든 정부의 대북 정책이 한국 핵무장 이슈까지 낳은 셈이라는 뜻인가.
“미국은 한국의 핵무장을 바라지 않는다. 선례처럼 핵확산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주의자와 한국이 그것을 추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게 현실이고, 트럼프 행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해법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다. 트럼프는 저명한 보수 인사를 북한 문제만을 다루는 특사로 지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중에는 특사가 국무부 부장관급이 됐지만 애초 트럼프가 정상회담 준비를 맡기고 평양에 특사로 파견한 이는 (국무장관이던) 마이크 폼페이오였다. 돌아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이번에도 고위급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미국·북한 간 정상 외교가 재개된다면 긴장 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자연스레 한국 핵무장 이슈도 어느 정도 무마될 것으로 믿는다.”
-미국 외교 정책상 북한 문제의 우선순위가 올라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트럼프는 미국 국가 안보에 대해 미국 우선주의 접근법을 취했다. 최근 AFPI가 펴낸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립주의가 아니다. 안보 관련 결정을 내릴 때, 조약을 체결할 때, 해외에 군대를 보낼 때 미국 국민의 이익을 우선 고려하는 것을 뜻한다. 바이든의 정책은 관념적이었다. 미국인 이익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기후변화 대응이 대표적이다. 기후가 장기 위협이지만 안보 위협은 아니다. 중국이나 테러리즘, 이란, 러시아 등 당장 미국인과 동맹 국민들을 죽일 수 있는 위협이 먼저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2017년 9월 250킬로톤 위력의 핵실험을 했고 곧 7차 핵실험을 할 수 있으며 미국 본토 동부까지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한 나라다. 어떤 대통령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위협이지만 바이든은 간과했다. 트럼프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첫 임기 때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다. 개인적 친분을 활용하는 정상 외교도 그중 하나다.
“그의 파격은 외교 정책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이었다. 김정은과의 개인적 친분은 상당히 유용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실험 중단과 지하 핵시설 봉인 결정에 트럼프의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아니었다면 2020년에 더 많은 성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 대통령도 요청만 한다면 트럼프가 기꺼이 만나려 할 것이다. 내가 조언한다면 미국에 왔을 때 워싱턴에서 바이든 관리들만 만나지 말고 (플로리다주) 팜비치로 가서 트럼프도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플라이츠 부소장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를 잘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가 친절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NSC 재직 당시 미네소타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수행했는데 경기장 한편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모인 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무대를 볼 수 없었고, 이 사실을 안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설 시작 전에 그들을 따로 만났다. 플라이츠 부소장은 “대통령의 관심에 정말 기뻐했던 그들을 기억한다”며 “트럼프는 사람들에게 그 일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든 관계를 거래로 취급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교 방식을 비판하는 이도 많은데.
“내 생각에 트럼프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적들이 있는 세계에 미국이 존재하고 그들과 함께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북한과의 이견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들 정권을 종식시킬 방법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김정은을 욕을 먹어 가며 친구라 부르는 것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거래 과정의 일부였다. 푸틴이 전범(戰犯)이라는 것은 모두 다 안다. 하지만 그가 헤이그(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받고 감옥에 가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가치 외교는 그럴싸하지만 얻는 게 없다. 상대를 악마화하면 협상할 수 없다. 바이든 행정부 초기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 대표단을 만나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공개 망신을 줬다. 그 뒤 양국 관계가 틀어졌고 긴장이 고조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실주의를 견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