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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이제 60대에 들어선 여성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으로 동네에서 ‘불쌍하다’는 동정의 시선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낮에는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던 어머니는 밤에는 아버지의 주사로 집에 있지 못하고 몸을 피하거나 폭력에 시달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복이 없어서 아들이 술꾼이 됐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함부로 대했고, 손녀인 저도 매일같이 “엄마를 닮아 나쁘다”고 혼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인 오빠는 끔찍이 챙기셨죠.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오빠에게 맞았습니다.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았지만, 오빠와 저는 덩치 차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거나 학교가 쉬는 날이면 오빠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제게 성폭력까지 저질렀습니다. 몸이 굳어져 저항하기 위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자신을 용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 탄 버스 안에서도 오빠는 성추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버스를 자주 놓쳐 다른 정류장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돌이켜보니 무의식적으로 오빠를 피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됐고,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지면서 딸인 제가 살림을 대신하게 됐습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가족들의 식사나 빨래, 청소 등을 챙겼고, 주말이면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했습니다.
제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졌을 때 어머니에게 “오빠가 나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정말 어렵게 털어 놓았지만, 어머니 말씀은 “앞으로 오빠가 잘할 텐데 네가 이해하라”뿐이었습니다. 한마디의 위로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제게는 오빠의 성폭력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결혼 이후로 저는 시간과 돈을 친정에 쏟았는데, ‘이렇게 노력하면 언젠가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원가족과 떨어져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늘 아들 자랑과 더불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제가 쏟았던 정성은 당연하다 여기시면서, 어쩌다 한번 아들이 자신을 병원에라도 모시고 가면 너무나 대단한 일로 생각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게도 오빠를 고맙게 여기라고 강요하시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참 서운하고 자신이 바보 같습니다. 돌아보면 인생을 친정 식구들에게 갈아 넣으면서도 저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고맙다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새벽마다 미친 듯이 글을 씁니다. 외국이라 개인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글쓰기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원가족들에게 오빠의 성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또 그동안 친정 식구들을 위해 애쓰고 수고했던 시간에 대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습니다.
한소정(가명·60·주부)
소정씨의 사연을 읽으며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한 가족의 구성원이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소통과 또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한 가족의 경우 한 사람을 ‘희생양’ 삼고 다른 이들끼리 편을 맺으면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정씨 어머니는 아버지의 주사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부부 사이에서 갈등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정씨에게 남편에 대한 불만을 하소연하면서 부부 관계를 삼각 구조로 풀어나갔고, 보호해 줘야 할 부모가 오히려 자녀인 당신에게 의존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직접 들은 당신은 다른 형제들보다 사랑과 존중, 보호는 덜 받으면서도 부모의 짐을 짊어지게 됐습니다. 가족 안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이런 역할을 해왔는데도 다른 가족들은 소정씨의 고생을 알아주지 않았죠. 가족으로부터 공감이나 인정을 받은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오빠에게 당한 성폭력 트라우마도 소정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지지받고 공감받았다면 상처가 잘 아물었을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사건 자체보다 이후 지지 과정의 해소가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소정씨 어머니는 오히려 “이해하라”는 태도를 보이며 공감해 주지 않았죠. 이런 성장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당신 안에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욕구는 성인이 된 이후로도 친정 식구들을 살뜰히 챙기는 행동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편애의 피해를 보며 성인이 됐는데도 원가족과 거리를 두기는커녕 오히려 더 희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정씨도 “‘이렇게 노력하면 언젠가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듯, 자신이 더 잘한다면 과거와 달리 가족들이 고마움을 느끼고 인정해줄지 모른다고 여기며 노력하는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사과나 인정은커녕 가족들에게 계속 이용만 당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소정씨는 사연에서도 원가족들에게 사과나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셨습니다. 이런 이해와 공감을 바라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사실 이런 마음이 오늘까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를 냉철하게 봐야 합니다.
우선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지를 알기 위해 당신의 복잡한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라면서 해소되지 못한 가족에 대한 친밀함의 욕구에 의해 의존성이 커졌을 수 있습니다. 소정씨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경험하지 못해 딸에게 하소연했던 어머니처럼 자칫하면 소정씨도 지금 가족과의 관계에서 비슷한 행동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긴 사연에서 당신의 현재 가족에 대한 언급이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원가족에 얽매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밀함은 소정씨가 새롭게 꾸린 가족과의 관계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소정씨가 서운함을 느끼는 건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취미인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당신이 가족으로부터 어떤 차별을 받았고 소외감을 느꼈는지, 또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로 인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과 오빠로 인한 수치심 등 다양한 ‘나의 감정’을 적어 보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쓴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왜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지’를 적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써보기를 권합니다.
오빠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 당시 느꼈던 감정과 오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정리를 해보는 과정에서 맞서 싸울 힘이 생겨납니다. 이런 힘을 기르지 않고 무조건 피하거나 부딪힌다면 반사적으로 두려움에 압도되는 자신을 보며 더 좌절할 수 있습니다.
거절도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원가족 구성원들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당신은 계속 이를 받아주었는데, 이제는 거절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물론 소정씨에게 거절은 너무나 힘든 일일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요구를 받기 전에도 나서서 해결하려 하거나 인정을 받으려는 행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그런 순간에 스스로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물론 그 순간은 굉장히 불안하고 두려울 겁니다. 과거에 받지 못한 인정을 지금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원가족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데, 들어주지 않는다면 당신을 더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불안이 생길 겁니다. 가족들의 비난도 있을 테고요.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독립이 가능해집니다. 갑자기 거절하는 것이 두렵다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거절을 해 보고, 최소한 적극적으로 먼저 호의를 베푸는 반사적 행동을 하지 않고 버텨보세요.
소정씨가 진정한 독립을 이룬 이후에야 원가족을 향한 미련이 사라져 현재 가정과 제대로 된 의존관계가 형성될 수 있고, 타인과도 균형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소정씨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는 소정씨 자녀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자녀들이 떠나는 순간 당신의 마음을 지키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소정씨가 지난 세월을 통해 쌓아온 강한 책임감이 어쩌면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정씨가 만든 새로운 가족과 스스로의 삶에 집중하는 데는 책임감이 얼마든지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원가족과 여러 일을 겪으며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책임감은 당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어줄 겁니다. 소정씨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