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씨 가문의 영광을 위해… 80m 담장에 새긴 예술혼

입력
2024.05.18 10:00
<139>영남 광동 ① 광저우 영남인상원, 진가사당

편집자주

장강과 주강의 분수령을 오령(五岭)이라 한다. 다섯 산맥인 오령 남쪽 일대를 영남(岭南)이라 한다. 광동과 광서를 두루 포함한다. 영남의 역사문화와 자연풍광을 살펴본다.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를 시작으로 포산, 중산, 장먼, 마오밍, 윈여우, 자오칭, 칭위엔, 샤오관까지 발품 기행을 떠난다. 모두 10회로 나눈다.



영남 건축과 문화 맛보기, 영남인상원

광저우 동남쪽에 소곡위도(小谷圍島)가 있다. 테두리 고(箍)였는데 곡(谷)이 됐다. 비가 내리면 테두리가 생기고 섬이 된다. 2003년 광저우대학성(廣州大學城) 건설을 시작했다. 대학 대부분이 옮겨왔다. 섬 남쪽 롄시촌(練溪村) 주민도 강 건너로 이주해 갔다. 빈자리에 영남인상원(嶺南印象園)을 열었다. 지하철 역에서 내리면 도보로 10분이다.


높이 솟은 요망탑(瞭望塔)이 보인다. 영남 전통가옥의 지붕과 누각 모양으로 꾸민 탑이다. 바로 앞에 두 사당이 나란하다. 육씨종사(陸氏宗祠)는 옛 현악기인 고금(古琴)을 소개한다. 악기와 악보가 전시돼 있다. 대생육공사(大生陸公祠) 입구에 무술 장면을 그려 놓았다. 백학권(白鶴拳)이라 쓴 거실이 나온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푸젠의 방칠낭이 창건했다고 알려진 남방 권법이다.

사당 지붕을 부드럽고 봉긋한 담장이 감싸고 있다. 바람과 불을 막는 역할을 한다. 커다란 가마솥 손잡이처럼 생겼다고 확이옥(鑊耳屋)이라 부른다. 다리 없는 솥인 확은 고대에 고기 요리에 사용하던 청동기다. 솥은 과(鍋)인데 남방 방언이라 생각하면 된다. 영남 일대 전통 가옥을 상징한다. 관음보살의 넉넉한 귀 같고 방한모와 비슷해 별칭이 관음두(觀音兜)다. 원래 겨울에 사용하는 머릿수건이란 뜻이다.

소씨종사(蕭氏宗祠)에 화등을 전시하고 있다. 여러 모양의 등이 사방에 걸려 있다. 광유당에 용이 구슬을 희롱하며 노는 장면이 보인다. 조명을 열면 더욱 화려하게 출현할 듯하다. 궁정에서 사용하던 궁등이 조명을 품고 주르륵 걸렸다. 종이를 오려 만든 공예인 전지도 전시하고 있다. 유리가 감싸고 조명까지 비추니 화사하다.

용머리가 붙은 배 한 척이 있다. 길고 좁은 용주(龍舟)다. 단오가 되면 경주를 하는 풍습이 있다. 기원전부터 민간에서 자주 치르던 행사이며 인류 최초의 단체 경기라 추켜세운다. 오늘날 올림픽 종목인 조정의 발원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전시관이 있어 들어가니 배의 구조와 제작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민간신앙의 진열장이라 할 만큼 묘우(廟宇)가 많다. 화신(火神)이라 부르는 화광대제(華光大帝)를 봉공하는 고묘가 보인다. 도교의 호법사성(護法四聖) 중 한 명이다. 명나라 소설 남유기(南遊記)에 옥황대제가 불을 관장하는 장군으로 봉한 인물로 나온다. 눈이 이마에 하나 더 있어 삼지안(三只眼)이라 불린다. 벽 가운데 포스터에 불꽃을 연상하는 배경으로 눈이 셋인 듯 아닌 듯 화신이 번쩍거리고 있다.

두로원군(斗姥元君)을 봉공한 묘우도 있다. 도교 서적 북두경(北斗經)에 따르면 주어왕(周御王)이 총애하는 왕후다. 최고의 존엄인 원시천존이 부부에게 은총을 내렸다. 이듬해 아홉 명의 아들을 출산했다. 장남과 차남은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사어(四御) 중 천황대제와 북극대제가 된다. 나머지 일곱은 북두칠성으로 거듭난다. 북두칠성의 어머니인 두모(斗姆)라고도 부른다. 팔이 여덟인데 모두 법기를 들고 있다. 인도 브라만교에서 ‘태양의 불꽃’인 마니끼쏘하(Maricideva)다. 중국어로 번역하니 모리즈텐(摩利支天)이다. 앞에 붙은 큰 대(大)는 존중이다.

포승상묘(包丞相廟)를 만난다. 북송 정치가 포청천 포증이다. 검은 얼굴에 낡은 관복을 걸쳐 남루하기 그지없다. 재신과 관음보살 등 온갖 신상이 널브러져 있다. 다른 신들에 비해 천대받는 느낌이다. 정의로운 기백이 넘친다는 건곤정기(乾坤正氣)가 적힌 금옥만당(金玉滿堂)이 바닥에 세워져 있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는 학식이 풍부하다고 했는데 재물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지식이나 재물이나 홀대할 일은 아니다.

지성공자원(至聖孔子園)에 공자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사서와 오경을 앞세운 대련이 있고 만세사표가 두 손을 모으고 미소를 띠고 있다. 글방에서 배워 굳세고 올바른 기개를 키운다는 몽학양정(蒙學養正)과 책을 읽어 사리분별 잘하면 예를 존중한다는 지서상례(知書尚禮)가 보인다.

스승에 대한 예법도 흥미롭다. 여섯 가지 예물로 은혜에 보답하는 육례속수(六禮束脩)다. 꾸준히 열심히 공부한다는 미나리, 행운이 대통한다는 팥, 일찌감치 과거에 붙는다는 대추, 심혈을 기울여 배운다는 연밥, 공로와 덕행이 완전무결하다는 용안, 스승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린 고기다. 스승의 날 묶음으로 팔면 호응이 있을까?

색다른 담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다와 가까운 강변이라 굴껍데기를 담장에 사용했다. 호각장(蠔殼牆)이라 부른다. 돌을 쌓고 황토와 석회를 바른다. 굴껍데기를 비스듬하게 다닥다닥 붙인다. 예쁘고 반듯할 뿐만 아니라 담장을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빗물이 쉽게 빠지며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불과 바람을 막는데도 막강하다. 훌륭한 건축자재이며 영남 건축의 특색이다.


도랑이 흐르고 거리는 북적인다. 학생 단체가 몰려와 어수선하다. 놀이기구가 많다. 어린이용 자이드롭 청와도(青蛙跳)와 회전목마를 타려고 줄을 많이 섰다. 물 위를 미끄러지는 수향표류나 밀림(?)을 달리는 기차도 있다. 이름과 썩 어울리지 않는데도 즐거움은 그 이상인 듯하다. 키가 1m 넘어야 들어가는 물고기 잡는 구역도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은 놀이동산이다.

목우예술관(木偶藝術館)이 시끌벅적하다. 국가무형문화유산인 꼭두각시놀음으로 흥미 있는 캐릭터가 많다. 종류도 다양해 나무막대와 실, 포대를 이용한다. 광둥오페라인 월극(越劇) 주인공도 전시돼 있다. 오페라는 배우, 목우는 인형이 주인공이다. 삼국지와 서유기, 홍루몽 주인공은 물론 포청천, 양산백과 축영대가 보인다. 친근한 이미지로 스타처럼 대우받고 있다.

4A급 관광지로 입장료가 60위안이다. 전통가옥의 원형을 그대로 두고 사당과 묘우를 손질했다. 문화와 예술 전시관도 많다. 규모가 크지는 않다. 문화거리에는 먹거리와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도 있어 나름 호황이다. 어렴풋하나마 영남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철로 찾아갈 수 있으니 몇 시간 정도 부담 없이 즐길만하다.

영남 건축예술의 보배, 진가사당

광저우 지하철 4호선과 8호선을 옮겨가면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영남 건축예술의 보배’와 만날 수 있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인 1888년 광둥 72개 현에 거주하는 진씨 일족이 모두 모였다. 5년 후 화려한 진가사당(陳家祠堂)이 탄생했다. 4A급 관광지 입장료가 겨우 10위안이라 놀랐다. 사당 입구에 서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80m에 이르는 긴 담장으로 이뤄진 대형 사당이다. 지붕과 담장에 수놓은 조각품이 강렬하게 유혹한다. 쉽게 다가가지 못하다 조금씩 전진한다.


정문 앞에 암수 한 쌍의 석사자가 도열해 있다. 오른쪽 수사자가 공을 누른 채 고개를 젖히고 안하무인처럼 바라보고 있다. 가문의 권위를 상징한다. 왼쪽 암사자는 새끼 사자를 떠받치고 있다. 자손이 왕성하고 친족이 번창하라는 바람이다. 이빨 틈보다 큰 매끄러운 구슬을 담고 있다. 사자 입에서 빠져나오지 않게 만든 조각(투조) 솜씨가 대단하다. 한가득 담은 재물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붕은 그야말로 총천연색 조각 공예가 펼치는 박물관이다. 전체 담장을 다 훑어 일일이 눈에 담느라 고개가 아플 지경이다. 담장에 유난히 몸집이 큰 동물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비슷한 모양새로 곳곳에 조각돼 박혀 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맹수다. 직사각형 안에 있는 공예에서 비밀을 엿보게 된다.

날개를 펼친 맹수와 완전무장한 여장부가 대치하고 있다. 전설로 전해지는 조미용타비웅(趙美容打飛熊)이다. 토번(티베트)이 중원의 송나라를 욕보이려고 비웅을 보냈다. 송나라 태조의 여동생 조미용이 단박에 제압한다. 황제와 토번 사신이 관전하며 대화하고 있다. 날개 달린 웅(熊)이라 했으나 곰은 아니다. 신화를 파헤쳐도 애매모호하다. 날개를 단 재빠른 호랑이일지도 모른다. 족제비과의 동물 중 몸이 매머드인지도 모르겠다. 정체불명인 동물에 착안해 맹수 이미지를 섞은 듯하다.


지붕 아래 담장은 벽돌 조각인 전조를 뽐내고 있다. 6폭인데 모두 명품이다. 봉황 선학 원앙 비둘기 꾀꼬리가 상징하는 오륜전도, 소나무와 까치가 주인공인 송작도, 새 소나무 대나무 모란을 형상화한 백조도, 서하가 송나라에 선물로 보낸 사나운 말을 굴복시킨 장군 이야기를 새긴 유경복낭구도(劉慶伏狼駒圖)까지 살펴본다.

양산취의도(梁山聚義圖)도 보인다. 52명 인물의 표정은 절묘하고 전통 복장은 고증이 탁월하며 동작까지 미세한 걸작이다. 오목하게 깊이를 조절해 인물을 배치하고 구멍을 내 복장을 디자인했다. 건물 형태나 문양도 치열하게 담았다. 수호지의 승화 예술인 셈이다.

봉황이 비상하고 있다. 비둘기처럼 귀여운 새끼 몇 마리도 어슬렁거린다. 오동나무, 버드나무, 살구나무를 함께 새긴 오동유행봉황군도(梧桐柳杏鳳凰群圖)다. 좋은 일이 끊이지 않고 기뻐하는 기색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뜻이다. 멋진 시도 새겼다. 북송의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다. 모두 368자 중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 각각 26자씩이다. 봉황은 물론이고 악양루가 있는 동정호와 접점이 있는지 모른다. 마지막에 인용한 ‘어부의 노래 서로 화답하니(漁歌互答), 이런 즐거움이 얼마나 지극하겠는가(此樂何極)’라는 말에 공감한 듯하다.

대문 하나에 쪽문이 4개다. 왼쪽부터 경기(慶基), 덕표(德表), 위영(蔚穎), 창규(昌嬀)다. 기반을 다진 일을 축하하거나 도덕의 모범을 뜻한다. 위영과 창규는 지명으로 진씨 발원지라 한다. 이삭이나 강물을 뜻하니 숨은 뜻도 있어 보인다. 문 위는 광동 건축의 실외 장식에 자주 보게 되는 소조 공예인 회소(灰塑)로 꾸몄다. 석회와 볏짚 등을 재료로 만든다. 진가사당 지붕의 울긋불긋한 분위기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경기문 조각은 관우가 조조의 부하장군 채영을 참수한 후 고성에서 유비와 장비를 다시 만난다는 고성회(古城會)다. 덕표문에는 도교의 신선이 거주하는 명승지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새겼다. 위영문은 앞에서 이야기한 조미용타비웅이다. 창규문은 도원결의다. 진가사당 앞 담장만 보는데도 진땀이다. 역사책을 자주 들추니 숨이 차다. 호흡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