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V9을 몰고 도로로 나선 지 얼마 안 돼 옆 차 운전자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신호등 정지 신호에 멈춰 섰는데 옆 차 운전자가 창문을 내려보라는 손짓을 하기에 창문을 내렸을 때였다. 그는 이 차를 살까 고민 중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반가웠다고 했다. 이어 그는 "디자인은 확실히 눈에 확 띈다"며 "기아 매장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EV9을 시승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차를 따라 이동하는 낯선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덩치는 크지만 수려한 외모를 갖춘 덕분에 EV9은 도로에서 보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실제 EV9은 '2024 레드 닷 어워드' '2024 iF 디자인 어워드' 등 세계적 디자인상을 받았다. 디자인만큼 성능도 뛰어날지 확인하려고 EV9을 최근 서울과 경기 과천시 등에서 약 100㎞ 몰아봤다.
첫인상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적절한 균형을 이룬 듯 깔끔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전면부 조명 역시 다양한 패턴(디지털 패턴 라이팅 그릴)으로 구현돼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외관만 봐서는 큰 차체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EV9 옆에 서면 이렇게 큰 차였나 싶은 생각에 놀라게 된다. EV9의 휠베이스(앞·뒤 바퀴 사이 거리)는 3,100㎜로 카니발(3,090㎜)보다 길다. 덕분에 차 안으로 들어가 보면 '넓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차량에 타서 가속 페달을 밟아봤다. 빈 차 중량이 2.6톤(t)에 달하고 배터리로 움직이는 차여서 힘이 달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기우였다. 가속력도 내연 기관차와 비교해 손색 없고 코너링 등 조향감도 쏠림 없이 부드러웠다. 주행모드 역시 에코(Eco), 노멀(Normal), 스포츠(Sport)로 바꿀 수 있는데 스포츠 모드로 바꿨을 땐 큰 덩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페달을 밟는 대로 가속도가 붙었다.
정숙성도 인상적이었다. 전기차 특성상 엔진음이 사라진 자리를 자동차 내부의 소음이 채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기차 운전자는 풍절음, 타이어 마찰음, 자동차 내부 소음 등이 더 크게 들린다. 다른 전기차를 운전했을 때 삐걱거리는 소음이 운전하는 내내 크게 들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EV9은 주행 시 유심히 들어도 거슬리는 소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운전 중 음악을 틀고 운전하면 이내 콘서트장에 온 듯 음악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EV9은 1회 충전으로 501㎞(19인치 휠 이륜 구동 모델)까지 달릴 수 있다. 99.8킬로와트시(kWh) 대용량 배터리를 담은 덕분이다. 21인치 휠 사륜 구동 모델도 454㎞까지 달릴 수 있다. 처음 시승차를 받았을 때 충전량이 89% 정도였다. 주행가능 거리가 400㎞ 넘는 것으로 나왔지만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초반엔 에어컨을 틀고 운전해도 되나 하는 걱정과 함께 남은 배터리 충전량을 수시로 체크했다. 하지만 시승차를 반납할 때 남은 충전량은 60%대였고 여전히 주행거리는 넉넉했다.
사실 EV9은 국내에서 인기 있는 차는 아니다. 기아 투자설명회(IR) 자료에 따르면 올해 1∼4월 내수 판매는 930대에 그쳤다. 반면 해외에서는 돌풍이라고 할 만큼 잘 팔린다. 같은 기간 수출은 1만2,211대를 기록했다. 미국(5,579대)에서만 한국의 다섯 배 넘는 EV9이 팔려 나갔다. 게다가 '2024 세계 올해의 차' '2024 북미 올해의 차' '2024 독일 올해의 차 럭셔리 부문' '2024 영국 올해의 차'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자동차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EV9은 지난해 6월 국내 출시 이후 수출의 힘으로 5만 대 판매 돌파(4월까지 총 4만8,291대 판매)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에선 가격이 가장 큰 장벽이다. EV9은 가격이 7,337만~8,163만 원으로 패밀리카를 고민하는 소비자에겐 망설이게 하는 수준이다. 배터리 가격의 영향으로 대체로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에 비해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소비자의 지갑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반면 미국 등에서는 이 정도 성능의 전기차라면 합리적 가격대로 여겨진다는 게 기아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