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통이 치밀어서, 원… 지금 당장, 1인 시위라도 나서야 될 판입니다.”
혀부터 찼다. 칠순을 넘어선 마당에 눈감고 뒤로 물러설 법도 했지만 타 들어간 속내까진 숨길 순 없는 듯했다. 근황에 대한 물음에선 평온했던 그의 목소리 톤도 금세 높아졌다. 영원한 ‘바둑황제’ 조훈현(71) 9단에게 요즘 국내 반상(盤上) 현안을 묻는 질문에 “한숨만 나온다”며 직설적으로 돌아온 답변에서다. “(정부가) 도와주진 못할망정, 되레 걸림돌만 놓고 있다”며 얼굴까지 붉힌 그는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바둑계의 ‘뜨거운 감자’인 정부의 일방적인 예산 삭감 칼바람을 염두에 둔 직격이다. 작심 발언은 9일 서울 평창동 그의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쏟아졌다. 그의 반상 철학 등을 소개하면서 희로애락이나 공유할 순 없단 절박함 때문으로 읽혔다. 그만큼, 풍전등화 신세에 직면한 국내 바둑계의 현실이 더 다급했단 얘기였다.
조 9단은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당장 반상 족적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통산 1,963승9무842패(승률 69.98%)를 기록 중인 그가 수집한 우승컵만 161개. 이 중엔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트로피가 9개나 포함됐다. 특히 최연소(9세7개월) 입단과 현재까지 진행 중인 최다승 세계 기록은 단연 독보적이다. 자국 내 전관왕 3회(1980년, 82년, 86년) 달성과 국제기전 그랜드슬램(응씨배 1989년, 동양증권배 1994년, 후지쓰배 1994년)도 사실상 ‘넘사벽’이다. 지난 2003년 당시 그가 ‘제7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차지한 최고령(49세10개월) 우승 기록 또한 전무후무하다. 그에게 1989년 수여된 ‘은관문화훈장’은 덤이다.
그렇게 최정상에서 꽃길을 걸어왔던 그가 느지막이 가시밭길인 장외투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뭘까. 지난해 한국기원에 17억1,300만 원과 대한바둑협회(대바협)에 21억6,200만 원이 각각 배정됐던 정부 예산이 올해는 기원이 15억4,200만 원으로 줄었고 대바협엔 전액 삭감된 예산 파동과 무관치 않았다.
그는 숱한 진검승부에서 ‘평정심’으로 상대방을 제압했고 세계 바둑계도 평정해왔다. 그랬던 천하의 조 9단도 이번 사태에 대해선 평정심을 유지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정부의 이번 조치는 상식 밖이란 게 그의 판단이다. “(바둑계의) 맥은 이어줘야 되잖아요. 숨은 쉬게 해줘야 할 거 아니냔 말이죠. 이대로면 바둑계는 고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번 예산 논란에 대해 최소한 바둑계의 생명을 이어갈 산소호흡기마저 끊어버린 처사로 규정했다. “없었던 예산을 새로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더 늘려달라는 요구도 아니란 말입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선 답답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2018년부터 시행된 ‘바둑진흥법’도 재소환됐다. 이 법은 지난 2016년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던 조 9단 주도로 발의,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국가가 바둑의 체계적인 보전과 진흥에 필요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법은 그냥 폼으로 만듭니까. 나라에서 진흥을 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잖아요.” 연신 한숨만 토해낸 조 9단의 눈은 이내 허공으로 향했다.
그는 급기야 극약 처방의 필요성까지 내비쳤다. “용산 대통령실 앞이든, 기획재정부 앞이든, 문화체육관광부 앞이든, 필요하면 프로바둑기사들이 모두 나가서 매일 농성이라도 해야 됩니다. 분위기가 조성되면 저도 나갈 겁니다.”
바둑계 내부에 대한 쓴소리 또한 잊지 않았다. 조 9단은 먼저 스타플레이어 부재를 짚었다. “바둑도 이젠 프로스포츠입니다. 스포츠엔 팬들에게 어필할 스타가 필요해요. 지금은 국제대회에서 통하는 신진서 9단이 있어서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그 이후가 보이질 않아요.” 신 9단은 지난 2월 열렸던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일본(1명) 및 중국(5명)의 초일류급 선수들을 상대로 기적 같은 6연승과 함께 대역전 우승 신화를 완성했다. 각국에서 5명씩 출전했는데, 신 9단을 제외한 4명의 한국 선수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안일한 프로의식’ 역시 척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꼽았다. “팬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외부 요인도 있겠지만 바둑 인기 하락의 주요 원인은 내부에서부터 찾아야 해요.” 최근 한 생방송 프로 경기에선 대국자 불참으로 시청자들은 어이없는 ‘기권패’를 지켜봐야만 했고, 국내 대회 결승전은 특별한 설명도 없이 생방송 대신 몇 시간 뒤에서야 녹화로 방영됐다.
화려했던 그의 반상 스토리에 얽힌 일화보단 K바둑 위기 진단 등에 대부분 인터뷰 시간을 할애했던 터였을까. 인터뷰 말미에선 희망 섞인 기대감도 내비쳤다. “K바둑은 위기에도 늘 기회를 찾아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믿습니다. 미력하지만 저도 그 일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바둑황제’의 마지막 다짐에선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