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집단 유급을 우려해 정부가 학사운영을 '학기제'에서 '학년제'로 바꿔 하반기에 1년 치 과정을 몰아치는 안을 제시했지만 대학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내년에 대폭 늘어날 신입생과 함께 교육받을 처지인 예과 1학년 유급을 막기에는 불충분하고, 본과 4학년이 정상 시간표대로 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하는 것도 어렵다는 게 이유다. "정부가 대학들 옥죄기보다 의정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먼저"라는 불만도 감지된다.
교육부가 의대를 운영하는 40개 대학에 요구한 집단 유급 방지 대책 제출 기한인 10일까지 일부 대학은 뾰족한 방안이 없어 아무것도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가 유급 방지책으로 예시한 학년제 역시 불충분한 고육책에 가깝다"는 반론도 나온다. 김진상 경희대 신임 총장은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학년제 전환에 대해 "워스트 케이스(최악의 경우)"라고 꼬집기도 했다.
고등교육법은 매 학년도에 30주 이상 수업을 운영하게 했으나 많은 대학은 학칙으로 학기제를 규정해 매 학기 15주 이상 수업을 진행한다. 학기제에서는 아무리 늦어도 5월 중 수업을 시작해야 최소 15주를 채울 수 있다. 올해처럼 개강을 했어도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복귀하지 않은 의대생들은 수업일수 부족으로 F학점이 불가피하고, 대부분의 의대에서는 한 과목이라도 F학점을 받으면 유급이다. 반면 학년제는 내년 2월까지 30주의 수업을 몰아서 마치면 돼 8월에 수업을 재개하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대학에서 이런 학년제 전환이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두 학년, 예과 1학년과 본과 4학년 때문이다. 의대 신입생인 예과 1학년은 다른 단과대 학생들과 교양과목을 같이 수강해 이미 진행 중인 수업을 하반기로 미루는 게 불가능하다. A국립대 총장은 "전공과목은 30주를 몰아서 할 수 있더라도 신입생이 듣는 교양과목은 그게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B사립대 총장도 "교양 수업을 의대 단위에서 운영하는 대학들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다른 단과대와 같이 수강하는 대학에서는 학년제 시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다른 학년에 비해 늦게 집단행동에 나선 예과 1학년들은 집단 유급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입학한 전국 40개 의대의 예과 1학년 3,058명이 전부 유급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내년에는 최대 4,567명으로 늘어난 신입생과 함께 총 7,000명 이상이 수업을 받아야 해 교육의 질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본과 4학년은 8월 이후 1년 치 수업을 30주 동안 진행하면 9월로 예정된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 응시가 어렵다. C사립대 부총장은 "교육부는 8월까지 개강을 연기할 목적으로 학년제를 제안했지만 본과 4학년은 실기시험이 9월에 시작돼 6월 초까지 복귀하지 못하면 시험 준비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의료법에 따라 의사 국가고시는 6개월 이내에 졸업하는 본과 4학년만 응시할 수 있다.
학년제가 오히려 의대생들의 반발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A 총장은 "30주를 하반기에 몰아서 한다고 하면 의대생들이 '그렇게 힘들게 배울 바에 1년 쉬고 말지'라며 더 안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에 의대 정원 확대를 위한 학칙 개정안이 일부 국립대에서 부결되는 마당에 유급을 막기 위한 추가 학칙 개정에 나서는 것도 대학에는 큰 부담이다.
의사들과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정부가 '장기전'에 대비하라며 대학만 들볶지 말고 의정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B 총장은 "무조건 내 말만 따르라는 태도로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데, '안을 가져오라'고만 하는 게 무슨 대화냐"며 "학칙 개정안을 부결시킨 대학은 얼마나 내부에서 고민이 많았겠나. 그런데도 교육부가 '너네 페널티 줄 거야'라고만 하는 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