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한 건물 옥상에서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정서경(가명·38)씨는 덜컥 '옥상에 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경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남자친구로부터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 경찰에 신고하고 그를 차단한 지난달 초부터 지금껏, 100통 넘는 연락에 시달리는 중이다. "남일 같지 않았어요.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 사람도 그랬을 수 있으니까."
한국일보는 사귀던 사람들로부터 폭력 피해를 당한 당사자와 그 유족(사망사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교제 폭력엔 명확한 전조증상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숱한 세뇌와 차가운 외부 시선 탓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본 피해자들은 '내가 살아남은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교제폭력 때문에 떨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을 위해, 연인이 범죄자가 되려는 바로 그 순간의 '전조 증상'을 널리 알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본보 인터뷰에 응했다.
시작은 폭언과 통제라고 한다. 서경씨의 남자친구였던 A씨는 옷차림뿐 아니라 명절이나 생일에 가족과의 만남까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블라우스에 난 작은 구멍에도 '가슴이 보인다'며 화를 냈다. 화를 주체 못한 A씨는 물건을 던졌고, 이어 손이 올라갔다.
다른 데이트폭력 피해자 김진아(가명·34)씨도 마찬가지였다. 진아씨는 "회사 상사와 밥을 먹는 것도 극도로 싫어했다"며 "네가 맞을 짓을 한다며 때렸고,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횟수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니 전조는 분명히 있었다. 헤어지자는 통보에 반응하는 가해자 태도에도 패턴이 있었단다. 먼저 ①'나를 버리지 말라'며 애원했다. 피해자의 연민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진아씨는 "울면서 사과를 하고 날 버리지 말아달라는데 여자친구로서 연민이 들었다"며 "그래서 '정말 화가 나서 저지른 실수구나'하며 받아주게 됐다"고 후회했다.
다음은 ②'너 때문에' 내가 때린 거라는 변명이 이어진다. 오히려 피해자로 인해 자기 삶이 망가졌다는 적반하장식 책임전가다. 가해자들은 툭하면 '나를 무시하냐'거나 '억울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서경씨는 "남자친구는 '네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으니 정신적 폭력을 가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며 "그랬더니 내가 그에게 아픔을 줬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해자는 상대의 신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상대를 구속·통제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며 "증상들이 반복되면 (살인과 같은)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폭언과 폭행의 마무리는 늘 ③애정표현이다. 폭력 뒤에는 늘 '사랑한다' 혹은 '결혼하자'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내가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사랑하기에 통제한다'는 식으로, 악순환은 반복됐다. 진아씨는 이것을 '길들이기'라고 표현했다. "그땐 얘가 절 악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했어요. 길들이는 방식인줄도 모르고요."
갖가지 가스라이팅(상대 심리를 교묘히 조작해 상대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탓하게 만드는 것)의 결과, 피해자들의 자기확신은 무너졌다고 한다. 자기가 피해자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경찰에 신고해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 돌아가기 일쑤였다. 지인이나 가족은 가해자 통제로 만나기 힘들었고, 수사기관마저 객관적 피해가 발생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할 때에만 개입이 가능하다.
사회적 시선이 무서웠다는 이들도 있다. "왜 맞고도 계속 사귀었나요?" 상담기관에서도, 병원에서도, 심지어 주변 지인과 가족들마저도 그렇게 물었다. 맞을 짓 했으니 때렸을 거라고, 남들이 그렇게 생각할까봐 두려움이 덮쳤다. 내가 선택한 연인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진아씨는 "내가 맞을 이유가 있어서 맞았다는 생각에 휩싸이니 도움을 요청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신고를 꺼린 요소였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던 만큼, 가해자는 신상정보와 회사 위치, 모든 동선을 알고 있었다. 무고죄나 쌍방폭행을 들어 역고소를 하겠다는 말에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오늘은 연인이 제발 화내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빌며 참고 또 참았다고 한다.
지난달 10일 경남 거제시에서 스토킹 가해자로부터 폭행 당해 사망한 이효정씨의 아버지도 가슴을 쳤다. "가해자로부터 떨어뜨리려고 아이를 타 지역 대학에 보냈거든요. 아이가 죽고 나서야 가해자가 같은 학교까지 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열 한 번을 경찰에 신고했었는데 늘 경고장을 보냈다거나 처벌을 불원한다며 사건이 종결됐어요. 경찰관들이 가족에게 한 번이라도 알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서경씨와 진아씨는 헤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서경씨는 자신을 내내 쳐다보지 않으면 때리는 가해자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진아씨도 잠깐의 헤어짐 동안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아닌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차차 깨달았다.
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건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지난해 11월 진아씨의 전 남자친구인 가해자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진아씨는 낮은 형량에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법원의 유죄 판결이 반가웠다. 가해자가 끝없이 말했던 '네 탓이다' '네 잘못이다'라는 말이 틀렸다는 게 증명됐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두려웠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잘못한 건 제가 아니라 '가해자'잖아요. 지금도 데이트 폭력을 겪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도망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