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하실래요?”
세상에 팔지 못할 물건도, 사지 못할 물건도 없습니다. 손안에 ‘당근’만 있다면 말이죠. 의류, 화장품, 가구, 냄비,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자동차, 아파트, 상가, 명품시계, 심지어 맷돌까지 상상도 못할 다양한 물품이 매일매일 사이트에 올라옵니다. 하지만 최근까지 개인 간 거래가 금지됐던 품목이 있어요. 바로 홍삼, 비타민, 단백질 보충제, 유산균 같은 건강기능식품(건기식)입니다. 현행법상 건기식은 영업 신고를 한 판매업자와 약국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무료 나눔도 불가능했죠.
건기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분들은 명절 선물로 들어온 홍삼 세트에 먼지가 쌓여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했을 겁니다. “먹기는 싫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환불할 수도 없고.”
이런 분들께 희소식을 전합니다. 이제 건기식도 당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8일부터 1년간 ‘건기식 개인 간 거래 시범사업’을 시작했거든요. 건기식을 먹지 않으면 처치 곤란이라 국민 불편이 크다는 지적이 많았고, 이미 온라인 판매가 보편화돼 제품 변질이나 유통 질서 혼란 등이 적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입니다. 식약처는 앞으로 시범사업 성과를 분석해 국민 실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제도화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다만 판매 자격과 기준은 아주 까다롭습니다. 여러 중고거래 플랫폼 중에서 당근마켓과 번개장터에서만 건기식 사고 팔기가 허용됩니다. 부적합 물품을 걸러낼 수 있는 필터링 및 사후 모니터링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두 플랫폼 외에 다른 경로를 통해 이뤄지는 개인 간 건기식 거래는 모두 불법입니다.
제품은 반드시 뜯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제품명은 물론이고 ‘건강기능식품’ 문구와 인증마크 등 제품 표시사항을 모두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요. 홍삼 세트를 열어서 한두 포를 먹고 나머지를 판매하거나, 소규모 묶음으로 재포장해 팔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소비기한은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합니다. 실온이나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제품만 거래 가능하고요. 냉장 보관해야 하는 제품은 자칫 유통 과정에서 변질될 수 있고 기능성분 함량 등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어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 몸안에 들어가는 식품인 만큼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건기식이 대부분 고가이다 보니 자칫 개인 간 거래가 영리 목적으로 왜곡될 우려도 있겠죠. 그래서 개인별 거래 가능 횟수는 연간 10회 이하, 금액은 누적 30만 원 이하로 제한됩니다. 개인이 사용하기 위해 해외 직구로 들여온 건기식도 당근에서 팔 수 없습니다.
시범사업이 시작되자마자 당근에는 건기식 판매 게시물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를 기준으로 찾아보니 15~20분마다 신규 상품이 등록되더군요. 집안 한구석에 방치돼 있던 홍삼과 비타민이 드디어 제 효능을 발휘할 때가 온 거죠.
그런데 제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당근에 비타민제 판매 게시글을 올리다 퇴짜를 맞았다는 겁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제보자가 판매하려던 비타민제는 건기식이 아니라 의약품이었어요.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개인 간 거래가 법으로 금지돼 있고요. 제보자는 “소비기한도 잘 적어 넣었는데 마지막에 ‘의약품/의료기기 아니죠?’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아니오’를 눌렀다가 곧바로 거절당했다”며 “베테랑 당근족으로서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고 울상을 지었습니다.
비타민이라고 해서 모두 다 건기식은 아닙니다. 비타민은 식품, 건기식, 의약품에 모두 사용될 수 있는 원료이니까요. 일례로 ‘오쏘O’은 건기식이고, ‘임팩O민’은 의약품이라고 하네요. ‘비타OOO’은 식품(음료)이고요.
홍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약처가 운영하는 ‘식품안전나라’에서 ‘홍삼진액’을 검색해 보니 제품마다 건기식, 식품 등 분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약품 정보를 제공하는 ‘의약품안전나라’에서도 ‘홍삼진액’으로 검색되는 의약품이 있더군요. 건기식 당근 거래가 허용되기 이전에 사이트에 올라온 홍삼 제품 게시물도 종종 보이는데요, 플랫폼 관계자에게 물어 보니 모두 ‘식품’이라고 해요.
이쯤에서 궁금해집니다. 식품과 건기식과 의약품은 어떻게 구분할까요. 식약처 담당자가 친절한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식품은 특별히 섭취 대상이나 목적이 없는 반면, 건기식은 영양소 조절이나 생리 기능 활성화 등 건강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고, 의약품은 질병 치료와 예방이 기본 목적이기 때문에 구분해서 관리하고 있다.” 식품인지, 건기식인지 의약품인지에 따라 제조 시 구비 요건, 개별 규격, 지켜야 할 표시, 광고 수준 등 관련 규정도 다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당근에 건기식 판매 게시물을 올리기 전에 제품 포장에 ‘건강기능식품’이라는 문구나 인증마크가 있는지 꼭 확인해 보세요. 모든 건기식에는 기능성 원료의 ‘기능성’이 표시돼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건강식품’ ‘자연식품’ ‘천연식품’ 같은 명칭이 들어간 제품은 건기식이 아니니 속지 마시고요.
그래도 헷갈린다면 식품안전나라와 의약품안전나라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만약 식품안전나라에 등록되지 않은 제품이라면 판매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약품안전나라에서 검색되는 제품이라면 의약품일 테니 당연히 개인 거래를 해선 안 되고요.
슬기로운 당근생활, 참 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