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K팝 보이그룹의 팬인 20대 직장인 신수진(가명)씨는 지난해 이 그룹의 팬사인회 등에 참석하느라 5,000만 원가량을 썼다. 수입의 대부분을 ‘덕질(좋아하는 대상에 심취해 파고드는 행위)’에 쏟아부은 셈이다. 신씨는 팬사인회에 갈 때마다 이 그룹의 똑같은 CD를 150~200장씩 샀다. 여기 든 비용은 회당 300만 원 안팎. 신씨는 “'팬싸컷(팬사인회와 커트라인의 합성어·팬사인회 참석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음반 구매 수량)'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300만 원 이상은 써야 안정권에 든다”라면서 “(주최 측이) 참석 가능 인원을 줄이면서 '팬싸컷'이 많이 올랐다”고 설명했다.
#. 20대 직장인 김채린(가명)씨는 “팬사인회에서 좋아하는 그룹의 멤버를 가까이서 직접 만나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나를 기억해줄 것 같아 계속 가고픈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한 번에 200만~300만 원을 쓰고도 탈락하면 '현타(현실을 깨닫는 순간)'가 와서 덕질을 그만둬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다시 또 시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팬사인회 참가자들이 그룹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3분 정도다.
걸그룹 뉴진스 소속사인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가 모회사 하이브와의 분쟁 과정에서 K팝 산업의 고질적 문제인 '가수의 랜덤 포토카드 판매'와 ‘음반 밀어내기’를 언급하면서 기획사들의 도를 넘은 상술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민 대표는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에서 “랜덤 포토카드와 밀어내기로 판매량이 늘면 팬들에게 부담이 전가되고 연예인도 팬사인회를 계속하느라 힘들다”면서 “지금의 음반시장은 너무 잘못됐다”고 지적했고, K팝 소비자들이 지지를 보냈다.
밀어내기는 기획사가 음반을 발매하면서 판매처에 음반을 수만 장 넘긴 뒤 팬사인회, 영상통화 등 이벤트를 통해 단계적으로 소진하도록 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판매처에서는 특정 기간 음반 구매자에 한해 1장당 1회의 이벤트 응모권을 준 뒤 추첨을 통해 겨우 30~100명을 뽑아 참석 기회를 준다. 대부분 무작위 추첨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음반 구매량이 많은 순서대로 줄 세우기에 가깝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과 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렇게 단기간에 끌어올린 음반 수량은 흔히 ‘초동(발매 첫 주 판매량) ○○만 장’ 식으로 홍보에 활용된다. 지난해 수십만 장의 초동 기록을 세운 한 걸그룹은 1년간 90회에 이르는 팬사인회와 영통(팬과 가수의 영상통화) 이벤트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팬사인회와 영상통화는 밀어내기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이벤트인데, 인원이 제한돼 있어 인기가 많은 그룹일수록 경쟁이 치열해 '팬싸컷'도 높다.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정상급 보이그룹의 팬싸컷은 500만~100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팬들 사이에선 팬싸컷 정보가 유료로 거래되기도 한다. 김씨는 “같은 그룹이라도 앨범에 따라, 또 음반 발매 후 언제 어디서 하는 이벤트냐에 따라, 당첨 인원에 따라 '팬싸컷'이 달라진다”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팬사인회 당첨자 수가 줄고 중국을 포함한 해외 팬들이 가세하면서 커트라인이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업계 안팎에선 K팝 팬들의 음반 마케팅 기법 중 밀어내기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본다. 팬 한 명이 동일 앨범을 수백만~ 수천만 원어치 사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매되는 음반은 대부분 버려진다. 신씨와 김씨는 “소매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대량 매입하는 업체가 있어서 그곳에 넘긴다”고 설명했다.
K팝 음반은 해외에서도 이 같은 판매 전략에 따라 대량 판매된 뒤 버려지고 있다. 환경을 해치는 폐기물로 전락하는 셈이다. 실제로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선 지난달 30일 한 일본인이 올린 K팝 음반 폐기물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 도쿄 시부야의 한 백화점 인근 공원에 하이브 산하 자회사(레이블) 플레디스 소속 보이그룹 세븐틴의 새 앨범 수십 개가 상자에 담긴 채 버려진 모습이 찍혔다. 이 앨범은 국내에서도 발매 첫날인 지난달 29일 226만 장이 팔렸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K팝 그룹 팬덤의 소비 욕구는 팬사인회를 없애는 것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폐기물을 줄일 수 있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