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 코칭스태프가 후원사 물색까지…세계 최강 K바둑의 '굴욕'

입력
2024.05.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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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지원 정부 예산 21억 원 전액 삭감 여파
"이대로면 10년 내 바둑 국대 사라질 것" 우려
아시안게임 메달도, 국가대항전 우승도 무의미
예산 한파에 '세계 1위' 신진서 "이건 아니다"

"명색이 국대(국가대표) 코칭스태프인데, 후원사까지 찾아다닌다네요.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좀···."

어렵게 운을 떼면서도 흐려진 말끝에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역력했다. 낯부끄러운 소식이 알려질 경우, 자칫 상황만 더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으로 읽혔다. 동시에 세계 최강으로 올라섰지만 정작 국내에선 찬밥 신세로 전락한 K바둑의 참담한 현실도 감지됐다. 현 바둑 국가대표 코칭스태프의 최근 근황을 귀띔한 한 중견 프로바둑기사의 착잡한 심정에서다. 이에 대한 원인을 올해 대폭 삭감된 정부 예산의 후폭풍으로 진단한 그는 "바둑에 대한 정부 홀대가 아쉬울 뿐이다”라며 “K바둑의 근간인 국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푸념했다.

국내 바둑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연초 예고됐던 정부의 혹독한 예산 한파를 견뎌내기가 버거워서다. 국내 바둑계 양대 축인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는 당초 계획했던 각종 사업의 전면 백지화까지 검토하면서 사실상 '멘붕(멘털 붕괴)'에 빠진 상태다.

7일 한국기원 등에 따르면 정부 측 권고를 수용, 올해 기원에 배정된 정부 예산 15억4,200만 원 가운데 6억 원을 대한바둑협회에 지원키로 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예산을 대한바둑협회와 나눴지만 당장 눈앞이 캄캄하다"고 토로했다.

실제 정부의 예산 삭감 칼바람에 바둑계는 '시계제로'다. 가뜩이나 줄어든 예산에서 절반가량을 떼어줘야 할 기원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다. 지난해 바둑계의 정부 예산을 살펴보면 프로 중심의 한국기원엔 17억1,300만 원이, 아마추어 위주의 대한바둑협회엔 21억6,200만 원이 각각 배정됐다. 이 예산으로 기원에선 선수육성 및 대회지원, 교육 및 인프라(기반), 국제교류, 국가대표 강화 훈련, 정규교육과정화 추진 등에 사용했다. 대한바둑협회에선 진흥기반조성, 각종 아마추어 대회 등을 지원했다.

하지만 올해엔 정부의 긴축 기조 여파에 기원측 예산은 15억4,200만 원으로 줄었고 대한바둑협회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 측은 "다른 스포츠엔 보급(한국기원)과 대회지원(대한바둑협회) 등으로 구분해 예산을 배정한 사례가 없는 데다 대회지원 부문 예산 또한 과도하단 외부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른 조치"라며 "한국기원 예산 중 일부를 대한바둑협회에 할애해달라"고 종용했다.

불똥은 국대팀에게도 떨어졌다. 국대팀 운영 예산이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면서 코칭스태프 규모도 축소됐고 기본적인 훈련비나 식대비조차 여의치 않다. 선수들의 훈련에 집중해야 할 국대 코칭스태프가 기원 측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후원사 물색까지 직접 챙기고 나선 배경이다.

바둑계 내부에선 “이대로라면 향후 10년내 K바둑 국대는 없어질 것”이란 얘기를 포함해 볼멘소리만 나온다. 특히 다른 스포츠에 비해 그 동안 바둑 종목이 가져온 국위선양 측면 등까지 고려하면 대폭적인 예산 삭감은 어불성설이란 입장이다. K바둑은 지난해 열렸던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남자단체), 은(여자단체), 동(남자개인) 메달 등을 포함해 전 종목에서 메달 획득에 성공했다. 올해 2월엔 한·중·일 바둑 삼국지로 알려진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신진서(24) 9단이 일본(1명) 및 중국(5명)의 초일류급 선수들을 상대로 기적 같은 6연승과 더불어 대역전 우승 신화까지 작성했다. 국대팀에서 10년 가까이 실력을 키웠다고 전한 신 9단은 "국대가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음에도 굉장히 힘들게 운영되고 있다"며 "최근 한꺼번에 20억 원 이상의 정부 예산이 깎였다던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한국기원 관계자는 "바둑계 사정을 전해 들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기획재정부와 논의해보겠다고 했다"면서도 "예산 추가 지원을 장담할 순 없는 형편이다"라고 전했다.

허재경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