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성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과 마주하면 만족감은 두 배, 세 배 커진다. 경남 산청과 합천의 경계인 황매산은 매년 이맘때 정상 부근 능선 좌우가 철쭉으로 붉게 물든다. 연둣빛과 진홍빛이 어우러진 모습은 곧 녹음으로 뒤덮일 고산의 마지막 봄 선물이다. 지난 2일 오후 황매산에 올랐다가 꽃잎보다 붉고 황홀한 진홍빛 노을에 취했다.
해발 1,113m,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지만 황매산에는 고산 특유의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없다. 이를테면 품이 넓고 넉넉하다든가, 오르기 힘든 악산이라는 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산청에서든 합천에서든 능선 바로 아래까지 차로 갈 수 있고, 거기서부터 이어진 탐방로도 동네 뒷산 산책하듯 순탄하기 때문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니 고산임에도 철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변에 지리산과 덕유산 능선이 웅장하게 둘러져 있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철쭉만 염두에 둔다면 황매산이 주는 즐거움의 절반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매산으로 가는 길 자체가 행복한 여정이다. 산청 읍내에서 황매산까지는 약 17㎞, 구불구불 산길을 넘다 보면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마을과 계단식 농경지가 숨은 그림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산청읍과 차황면 경계인 달음재에서 잠시 쉬어간다. ‘천왕봉 전망대’라 이름한 팔각정에 오르니 지나온 방향으로 지리산 산줄기가 우람하게 펼쳐진다. 차황면 소재지를 지나면 길은 한층 더 구불구불한데, 도로 양쪽으로 노란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꽃가지가 늘어져 있다. 산 이름처럼 황매화를 가로수로 심었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지만 지역의 명산에 하나라도 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황매산은 넓고 크다는 의미의 ‘한뫼산’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후에 한자어로 바꾸며 황매산이 됐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황매화와는 상관이 없는데도, 산청군과 합천군 홈페이지에 ‘황(黃)은 부(富), 매(梅)는 귀(貴)를 의미한다’는 해설을 곁들여 놓았다. 황매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듬뿍 배어 있다.
다시 고개(두무재)를 넘으면 내리막길 도로 우측에 ‘황매산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바위 능선 아래로 산줄기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몇몇 마을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아래부터 신촌, 만암, 상법마을이다. 전망대 한쪽에 누구의 작품인지 모를 시가 한 수 적혔는데, ‘마너물 내 고향’이라 표현하고 있다. 황매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지명으로 굳어졌고, 만암마을은 마너물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라 한다. 마을 주변 경사지는 층층이 계단식 논밭이다. 모내기를 앞두고 흥건하게 물을 댄 논에 햇살이 내리쬐며 수면이 반들거린다. 굳이 따지자면 황매산 전망대가 아니라 다랑논 전망대인 셈이다.
예전 황매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각 마을에서 연결돼 있었다. 산행은 대개 신촌마을에서 출발해 상법마을로 내려오는데, 오르는 데만 2시간 정도 걸린다. 지금도 번잡함을 피해 호젓하게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7부 능선에 조성된 미리내파크까지 차로 오른다. 주차장과 카페, 캠핑장을 갖춘 공원이다. 마을부터 미리내파크까지 도로는 가파르고 굴곡이 심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올라갈 때는 신촌마을, 내려올 때는 상법마을을 거치는 일방통행으로 운영된다.
미리내파크 주차장에 도착하니 울긋불긋한 기운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다. 분홍빛 철쭉 꽃송이 뒤로 황매산 정상 부근 바위 봉우리가 거칠고 웅장하다. 매부리를 닮은 봉우리에서 가파르게 쏟아져 내린 산자락에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듬성듬성 머리를 내민 키 큰 나무가 섞여 단조로움을 상쇄한다. 매끈하게 포장된 탐방로는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능선까지 연결된다. 초록 잎사귀와 진분홍 꽃잎이 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찬란하다.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해초처럼 한 굽이 돌 때마다 근육질 산줄기에 보드라운 꽃잎이 하늘거린다.
조금 짧은 등산로는 꽃물결에 풍덩 빠져 걷는 길이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철쭉 사이를 걷는다. 중간에 아담한 연못이 하나 있고, 거북처럼 생긴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진다. ‘돌팍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못 뒤에는 차황면 주민들이 제를 올리는 ‘풍년제단’이 설치돼 있다. 황매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예부터 식수와 농업용수로 쓰였다.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였다.
해발 900m 능선 부근에는 짧은 석축 위에 망루가 세워져 있다. ‘황매산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만 산청군이나 합천군 어느 자료에도 산성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전망대 겸 포토존 구실을 하는 구조물이다. 망루 뒤편에 전국에서 몰린 사진작가가 삼각대를 펼치고 있다. 지난 2일 산성 주변 철쭉은 아직 개화가 덜 된 상태였다. 축제가 12일까지 잡혀 있으니 이번 주에는 능선까지 붉게 물든 장관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님들이 카메라를 받쳐 놓은 게 철쭉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오자 산성 뒤편 하늘에 벌건 기운이 번진다.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지리산 산줄기가 우측 덕유산 자락으로 가물가물 사라진다. 남덕유산 방향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힘을 잃어가자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던 낮은 능선이 신기루처럼 어렴풋이 형상을 드러낸다. 웅장한 산줄기가 겹치고 겹쳐 잔잔한 물결처럼 너울거린다. 해가 떨어진 후에도 철쭉보다 붉고 황홀한 노을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황매산 노을을 보려면 번거롭더라도 바람막이 점퍼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 해가 지기 무섭게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주차장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면 내려올 수 있다. 어스름이 남아 있을 때 하산하길 권한다.
황매산 철쭉을 즐기고 시간이 난다면 정취암과 단계마을을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정취암은 차황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대성산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 6년에 창건한 사찰로 기암절벽에 매달린 듯 자리 잡고 있어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찔하면서도 시원하다. 거북처럼 얹혀진 바위며 그 옆에 뿌리 내린 소나무도 신비스럽게 보인다. 절간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너럭바위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는데, 산 아래 마을과 들판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속세를 벗어난 적막감만 가득하다.
인근 신등면 소재지의 단계마을은 한옥과 돌담길이 정겨운 마을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담장이 골목골목 이어져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김인섭 고택과 권씨고가, 박씨고가 등 오래된 한옥뿐만 아니라 순천박씨 고택을 개조한 한옥스테이와 소박한 민가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멋을 낸 돌담이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학교, 파출소, 상가 등도 한옥이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마을 이름은 조선 후기 문인 단계 김인섭(1823~1903)의 호에서 따왔다.
산청의 모든 길은 경호강으로 연결된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산청 땅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 진주 남강댐에 합류한다. 길이 32㎞의 짧은 강이지만 폭이 넓고 물이 맑아 산청을 더 산청답게 하는 물줄기다. 대전통영고속도로나 함양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여러 차례 그림 같은 풍경이 스치는데, 바로 경호강이 빚은 풍광이다.
경호강 상류 생초면에 봄이면 반짝 주목받는 관광지가 있다. 이름도 거창한 생초국제조각공원이다. 산청국제현대조각심포지엄에서 확보한 국내외 작가의 작품 27점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그러나 조각을 보자고 이 공원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조각공원에 조성한 꽃잔디에 이끌려 찾아오는 관광객이다. 분홍과 흰색 꽃잔디로 경사면에 축구공, 물고기 등 여러 형상의 꽃밭을 만들었다. 지금은 절정을 넘겨 색이 바래고 있어 한쪽에 또 다른 꽃을 심고 있다. 경호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은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산청 읍내를 통과하는 경호강 옆 언덕에는 2022년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를 복원해 놓았다. 1395년 산청현감 심린이 산음현 객사 후원으로 처음 지었고, 1950년 화재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산청의 상징적 누각이었다. 옛 자료를 보면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였고, 전국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지은 한시 12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당시 영남 3대 누각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약 630년 만에 본모습을 찾은 환아정은 ‘ㄱ’ 자 구조의 커다란 누각이다. 넓고 시원한 마루에 오르면 기둥 사이로 읍내를 둘러싼 산줄기가 그림처럼 장식하고 있다. 누각 아래 절벽에는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짧은 구간 조선의 선비들처럼 산과 강이 어우러진 정취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