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해병 2명 尹에게 공개 서신
"미안함 반복하고 싶지 않아" 호소해병대 채모 상병과 수해 실종자 수색 작업 중 급류에 휩쓸렸다 구조된 생존 해병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채 상병 특검법' 수용을 촉구했다. 이들은 동료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다.
군인권센터는 7일 해병 예비역 2명이 전해 온 편지를 공개했다. 해병들은 서신에서 "눈 앞에서 동료를 놓쳤던 그때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미안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이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피해 복구를 하러 간 해병 대원들에게 아무 준비도 없이 실종자 수색에 투입시킨 사람은 누구인지 △가만히 서있기도 어려운 하천에 구명조끼도 없이 들어가게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물었다. 이어 "하나뿐인 아들을 맡긴 부모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 나라의 당연한 책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편지에는 숨진 채 상병을 향한 죄책감도 담겼다. 지난해 7월 19일 채 상병과 실종자 수색 작업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무방비 상태로 급류에 휩쓸렸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살려달라던 전우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미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사고 후 채 상병을 맘껏 그리워할 수 없는 부대 분위기도 언급했다. 이들은 "정작 위험하고 무리한 작전을 지시했던 사단장과 여단장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리를 지켰다"면서 "(채 상병 문제는) 이제 서로의 안위를 위해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가 됐다"고 털어놨다. 예비역 해병들은 아직 복무 중인 후임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힘들다고 어디 말 할 데조차 없고, 죄진 것 없이 죄 지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센터 측은 "국민의 분노를 가볍게 생각 말라"며 특검법 수용을 촉구했다. 특히 특검법 통과를 두고 '나쁜 정치'라고 비난한 대통령실을 두고 "나쁜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생존 해병대원 서신 전문
윤석열 대통령님께 드립니다.
필승, 저희는 해병대 제1사단 고 채아무개 해병의 전우, 예비역 해병 ㄱ, ㄴ입니다. 채 상병과 함께 군 생활을 했고, 채상병을 떠나보낸 후 만기 전역했습니다.
2023년 7월19일 아침, 저희는 호우 피해 실종자를 찾으라는 지시에 따라 하천에 들어갔습니다. 위험한 작전이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늘 그랬듯 함께 고생하고 다 같이 부대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채 상병은 저희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날, 채 상병과 저희 두 사람, 그리고 여러 전우들은 무방비 상태로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저마다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사라져 가는 채 상병이 보였습니다. 살려달라던 전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미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 저희는 채 상병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간부님들, 동기, 후임들 모두 너무 힘들어 보였지만 서로 다독일 뿐, 사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내가 무너지면 다들 무너질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일상을 찾아갔습니다. 조사를 나왔던 군사경찰 수사관님에게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얘기했으니 채 상병과 부모님의 억울함과 원통함은 나라에서 잘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채 상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 전우인 저희에게 남은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채 상병의 죽음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질 거라며 눈물을 참던 중대장님은 여단의 다른 보직으로 전출되셨고, 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던 대대장님은 보직해임 되어 떠나셨습니다.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위험하고 무리한 작전을 지시했던 사단장님과 여단장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뉴스에서는 사단장님이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부하들을 선처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현실은 거꾸로였습니다. 모든 책임은 부하들이 지고, 선처는 사단장님이 받았습니다.
그 뒤로 9개월 동안 채 상병과 저희가 겪었던 끔찍한 일이 매일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걱정되어 꺼내지 못했던 채 상병 이야기는, 이제 서로의 안위를 위해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말하는 주제였지만, 저희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 분위기가 사나워 다들 쉬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병대를 이끄는 사령관님과 사단을 이끄는 사단장님이 다 엮인 일인데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곧 전역한 저희들은 취업과 복학을 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사고를 같이 겪었던 후임들은 대부분 아직 부대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힘들다고 어디 말할 데조차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그렇듯이, 그 친구들도 죄진 것 없이 죄 지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두 달 뒤면 채 상병 1주기입니다. 채 상병을 기리는 자리에 사령관님, 사단장님 같은 분들도 아무렇지 않게 참석하시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그런 자리에 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채 상병을 맘껏 그리워하고, 솔직하게 미안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임들은 현역 군인이니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죄진 것 없이 죄지은 마음으로 다녀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 내 대통령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대통령님. ‘채 상병 특검법’을 수용해주십시오.
채 상병 특검법을 ‘죽음을 이용한 나쁜 정치’라고 표현한 대통령실의 입장을 뉴스로 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희마저 채 상병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가 발생하고 벌써 9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이제는 특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피해 복구를 하러 간 우리를 아무 준비도 없이 실종자 수색에 투입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만히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급류가 치던 하천에 구명조끼도 없이 들어가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둑을 내려가 바둑판 모양으로 흩어져 걸어 다니면서 급류 속에서 실종자를 찾으라는 어이없는 판단을 내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현장과 지휘 계선에 있었던 모두가 누구의 잘못인지 잘 알고 있는데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와 채 상병 모두 내가 나고 자란 나라를 지키고자 남들이 말린 힘든 해병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이런 저희에게, 그리고 해병대를 믿고 하나뿐인 아들을 맡기신 채 상병 부모님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나라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저희는 정치에 별 관심 없었던 평범한 20대였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채 상병을 놓쳤던 그때처럼, 채 상병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미안함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 부탁드립니다.
대통령님.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4년 5월7일
대한민국 해병대 예비역 해병 ○○○, ○○○ 드림
김태연 기자 tykim@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