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1년여간 의과대학 증원을 의사단체와 협의하면서 회의록을 남기지 않은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의협)와 합의해 보도자료로 대체했다고 설명하지만 의사들은 회의록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트집 잡아 총공세에 나섰다. 의대 증원 여부가 달린 법원 결정이 나오는 이달 중순까지 '회의록'을 둘러싼 공방전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6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을 맡은 서울고법이 정부에 정책 결정 근거 자료를 요구해 보건복지부는 '의사인력 추계 연구 보고서' 세 건과 증원을 논의한 회의 자료, 전국 의대 대상 수요 조사 결과 등을 오는 10일까지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자료를 충실히 준비해 소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대 증원이 논의된 주요 회의체는 △정부·공급자·수요자·전문가로 구성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교육부 소관인 의대정원배정심사위원회 △복지부와 의협이 일대일로 참여한 의료현안협의체다. 보정심은 보건의료기본법에 기반한 보건의료 정책 심의 기구로, 올해 2월 6일 2025학년도 의대 신입생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 보정심 회의록은 복지부가 갖고 있다. 정부는 의대정원배정심사위 회의록 등도 위원 신변 보호를 위해 명단을 가린 뒤 제출하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문제는 회의록이 남지 않은 의료현안협의체다. 의료현안협의체는 지난해 1월 26일 출범해 올해 초까지 28차례 회의를 열었다. 당시 복지부와 의협은 원활한 협상을 위해 회의록을 따로 작성하지 않고 양측이 협의한 사항을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회의가 끝나면 현장에서 언론 브리핑도 진행했다. 의료현안협의체는 법정 기구가 아니라 회의록 작성 의무도 없다.
의료현안협의체 보도자료에는 필수의료·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해 의료 인력 재배치 및 양성 방안, 의사 인력 확대 필요성 등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담겼다. 일례로 지난해 6월 8일 10차 회의 자료에는 '복지부 의협 합의 사항'으로 △미래 의료 수요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필요 인력 수급 추계 △의사 인력 수급 모니터링 등 사후평가를 통한 정원 재조정 방안 마련 △확충된 의사 인력이 필수의료·지역의료로 유입될 수 있는 방안 마련 등이 언급됐다. 11월 23일 18차 회의 자료에는 의협 협상단이 복지부가 시행한 의대 증원 수요 조사에 항의하고 모두발언 후 퇴장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회의록은 없어도 의제와 양측 입장은 보도자료에 남아 있지만 의사단체들은 회의록 부재를 문제 삼아 2,000명 증원의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백 년 국가 의료 정책에 대해 회의 후 남은 게 겨우 보도자료밖에 없다"며 "밥알이 아깝다"고 비난했다. 의료현안협의체에는 의협 전임 집행부가 참여했고, 현 집행부는 이달 1일 임기를 시작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도 6일 성명을 내 "주요 회의는 공공기록물관리법에서 회의록을 의무 생산하도록 규정하고 있기에 회의록이 없다는 것은 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정부는 이제라도 의대 증원, 배정 과정의 절차적 위법성을 인정하고 행정 폭주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정근영 전 분당차병원 전공의 대표와 의대 증원 무효화 소송 여러 건을 대리하고 있는 이병철 변호사(법무법인 찬종)는 공공기록물 폐기, 직무유기 혐의로 복지부 장차관과 교육부 장차관 등을 7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서울고법은 의대 증원 집행정지 여부에 대해 이달 중순 결론을 내린다. 원고의 신청을 인용하면 의대 증원에 제동이 걸리지만 기각 시 정부 정책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된다. 의사단체들은 법원 결정 전까지 의대 증원 근거 자료 공개를 압박하며 여론몰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교수들의 집단 사직과 휴진도 별 효과가 없어 의사들에게 남은 카드가 법정 싸움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