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늘 잘생겼다.”
출산 전 무통주사를 맞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있던 최정민이 갑자기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민의 허벅지, 엉덩이를 마사지해주던 김교식은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곧 둘째가 나올 것이기에, 부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살뜰한 정민은 분만 직전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저 이제 들어가요.”
2022년 10월 11일 오후 7시 40분, 대구의 한 분만병원에서 갓 태어난 남자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도, 산모도 건강했다. 의사는 분만 시 절개한 회음부를 봉합하고 있었다. 그런데 커튼 너머 산소포화도 측정기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아내 질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후 8시 40분쯤, 김동수(71·가명)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들 교식이 “아버지, 정민이가 이상해요”라고 울먹거렸다. 깜짝 놀란 동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며느리 정민이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의식은 없었다. 5㎞ 거리에 경북대병원이 있어, 빨리 가면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급차 안에서 정민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교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보,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민은 심장이 멎었다. 만 34세. 지병 하나 없던 아내가 아기를 낳고 1시간 40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부자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검을 의뢰했다. 사인이 양수색전증으로 추정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의견이 나왔다. 분만 중 양수나 태아의 조직이 산모의 혈관으로 들어가 호흡곤란, 경련, 출혈, 심폐정지 등을 일으키는 치명적 질환이었다.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과정에 의해 일어나는지 밝혀진 게 없었다.
의료진 과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많았지만, 부자는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말 법원은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병원 측이 수액 투여 및 수혈 등의 처치를 하지 않고, 심정지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조차 하지 않은 사실은 모두 인정됐다. 하지만 양수색전증 상황에서는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산모가 살아났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재판부 결론이었다. 부자는 항소하지 않았다.
정민의 빈 자리는 너무나 컸다. 며느리를 딸처럼 여겼던 동수는 분만 직전 정민과 나눈 통화녹음을 지금까지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교식은 분만 직전 자신을 바라보며 “잘생겼다”고 했던 정민의 모습이 요즘도 꿈에 나온다.
대학병원에서 10년 이상 환자를 봐온 산과(産科)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모성사망을 "예고 없이 찾아오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암을 비롯한 만성질환은 사망 시기가 예측 가능해 본인도 가족도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있다. 교통사고를 비롯한 중증외상은 느닷없이 닥치지만 사인은 명확하다. 하지만 모성사망은 건강했던 산모가 아기를 낳다가 예고 없이 눈을 감는 경우가 많아 황망함이 더하다.
한국일보가 최근 10년간 의료 소송 판결문과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사례 등을 토대로 산모 103명의 죽음을 추적한 결과도 비슷했다. 산모 10명 중 7명은 분만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진 맥박·호흡·체온 등 생체활력 징후에 이상이 없었지만, 출산 중 또는 출산 이후 갑자기 질환이 생겨 며칠 만에 사망했다. 특히 양수색전증에 걸리면 정민처럼 몇 시간 만에 사망하기도 했다. 산후출혈이나 임신성 고혈압도 순식간에 산모 상태를 악화시켜 목숨을 앗아갔다.
박도윤(가명·40)씨에게 찾아온 아내의 죽음도 그랬다. 아내는 임신 37주 차인 2012년 10월 22일 오후 8시쯤, 제왕절개로 3.34kg 아기를 출산했다. 이상 징후가 없어 2시간 뒤 일반실로 옮겨졌다. 한숨 돌린 박씨는 근처에서 해장국을 먹고 40분 만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했다. 갑작스러운 산후 출혈로 의식을 잃은 아내는 20여 일 뒤 세상을 떠났다.
권영준(가명)씨도 아내를 허망하게 떠나보냈다. 2010년 6월, 아내는 제왕절개로 셋째를 출산했다. 아기와 산모가 건강해 보여, 권씨는 일요일 아침 예배를 위해 다음 날 교회에 갔다. 감사 기도를 드리고 정오쯤 병원으로 돌아왔는데, 아내가 의식이 없었다. 의사가 기도삽관을 시도하고, 심폐소생술까지 했지만 아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리 쪽 정맥에서 생긴 혈전(피딱지)이 폐로 이어지는 혈관을 막는 폐색전증이 원인이었다.
애초에 산모가 건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 사망한 산모 103명 중 수술 이력이나 고혈압, 당뇨 같은 기저질환이 있던 산모는 19.4%(20명)에 그쳤다. 분만 직전 체온·맥박·호흡·혈압 등에 이상이 있는 산모도 31.0%(32명)에 불과했다. 분만실에 들어가기 전까진 대부분 멀쩡했기에, 산후출혈이나 색전증 같은 합병증의 발병을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산모 103명 중 45명(43.7%)은 색전증으로 사망했다. 색전증은 예방이 쉽지 않은 데다, 사후 대처도 어렵다. 일단 발병하면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사망한 산모 45명 중 33명(73.3%)은 분만 당일 또는 다음 날 눈을 감았다. 2009년 박모(32)씨는 임신 40주 차 때 유도 분만(약물로 자궁 수축을 일으켜 출산)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제왕절개 수술대로 옮겨지다 의식을 잃고 30분 만에 사망했다. 부검 결과, 폐에서 점액과 솜털 등 양수 성분이 발견됐다. 양수색전증이었다.
최고 의료진을 보유한 상급종합병원(대형병원)도 양수색전증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2013년 4월, 경기도 한 대형병원 병실에서 아내 몸을 주물러주던 이모(32)씨는 파랗게 변한 아내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두어 시간 전만 해도 아기를 낳고 혼자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이씨가 의사를 부르려던 찰나, 아내가 ‘헉’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의료진이 달려와 산소를 공급하고 수액치료를 했지만 얼마 뒤 심정지가 왔고, 다음 날 새벽 눈을 감았다.
양수색전증은 골든타임도 짧고, 처치도 어렵다. 산모 8,000명당 1명꼴로 발생하고, 사망률도 60%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한 번 발병하면 불가항력적인 죽음에 가까운 셈이다.
산후출혈(28건·27.2%)은 양수색전증 다음으로 산모들을 숨지게 했지만,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대학병원에서 산후출혈로 산모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조건이 있다. ①산모가 30분, 늦어도 1시간 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야 하고 ②의료진이 즉각 응급처치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산후출혈 사망 사례 중에는 두 조건 중 하나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2017년 아내를 잃은 이성빈(50)씨가 그랬다. 아내는 4월 24일 밤 11시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지만, 자궁 출혈이 너무 심해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 종합병원이 2㎞ 거리라 금방 도착했지만,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응급처치를 해줄 의사가 없었다. 3시간이 지나서야 출혈을 멈추기 위한 시술(색전술)이 이뤄졌지만, 아내는 심정지로 사망했다.
의료 접근성이 산모의 생사를 가르기도 했다. 박도윤씨 아내가 출산한 충남 공주의 산부인과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은 차로 40여 분 거리에 있었다. 박씨 아내의 산모용 패드가 다 젖을 정도로 출혈 증세를 보인 시점이 밤 10시 30분. 대형병원 응급실에 자정쯤 도착했지만, 아내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모성사망을 유발하는 질환 중 그나마 예측 가능한 것은 임신성 고혈압이다. 임신에 따른 변화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혈압이 올라가면서 신장 기능에 이상이 생기고 단백뇨가 나타나는 병이다. 임신 20주 이후에 고혈압을 동반한 단백뇨가 관찰되면 임신중독증으로 진단한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병은 아닌 셈이다.
다만 적정 치료(분만) 시기를 놓치면 순식간에 상태가 악화해 산모가 사망할 수 있다. 맏딸을 잃은 김성현(가명·79)씨가 그랬다. 2017년 2월, 임신 35주 차 딸의 혈압은 157/96mmHg, 단백뇨 수치는 1,000mg에 달해 기준치를 초과했다. 부기가 너무 심해 슬리퍼조차 신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사는 일주일 뒤에 제왕절개를 하자며 산모를 돌려보냈다. 다음 날 오전 딸은 우측 옆구리 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뱃속 쌍둥이 중 한 명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딸도 몇 시간 뒤 간 파열로 눈을 감았다.
이재혁(가명·63)씨도 비슷한 시기에 딸을 잃었다. 새벽 3시쯤 임신 36주 차 딸은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전날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육아용품을 산 뒤 친구 집에서 자다가 극심한 두통이 찾아온 것이었다. 응급실 도착 당시 수축기 혈압은 정상 범위를 훨씬 초과한 211mmHg.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 의사는 “혈압이 오르면 바로 아기를 꺼내야 한다”고 당부했던 터였다. 딸은 병원에 그 얘기를 전했지만, 제왕절개는 오전 8시에야 이뤄졌다. 분만 후에도 두통을 호소한 딸은 오후 3시쯤 이씨에게 “머리가 아파” 하더니 탱크가 지나가듯 코를 골았다. 그때 이후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뇌내출혈이었다.
박지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임신중독증에 걸리면 아기와 태반을 꺼내기 전까지는 산모 상태가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며 “오늘 간 수치가 정상이었는데 다음 날 30배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분만 경험이 풍부한 의사들은 아무리 늦어도 1시간 내에 산모를 응급 처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성원준 경북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색전증이나 산후출혈 같은 응급 상황이 닥치면 몇 분만 처치가 지체돼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며 "산과, 마취과, 소아과, 영상의학과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고위험 산모·신생아통합치료센터를 더욱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산모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족들은 병원이나 의사를 상대로 소송에 나서지만, 의료진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는 30%를 넘지 못했다. 본보가 조사한 의료 소송 71건 중 의료진 책임이 인정된 경우는 29건(40.8%). 이 중 8건은 의료진이 사전에 사망 가능성 등을 설명하지 않은 경미한 과실이라, 실제 과실이 인정된 건 21건(29.6%)에 그쳤다. 의료소송 전문 정현진 변호사는 “배상 책임이 인정돼도 그 비율은 청구 금액의 20~30% 정도”라며 “법원도 출산은 위험성을 내포한 행위라는 점을 인식하고 보수적으로 접근한다”고 말했다.
다만 사인에 따라 재판 결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전 예방과 사후 대처가 쉽지 않은 양수색전증의 경우, 최근 판결 20건 중 의료과실이 인정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폐색전증도 소송 9건 중 유족 승소는 1건에 불과했다. 반면 골든타임이 존재하는 산후출혈은 20건 중 10건에서 과실이 인정됐다. 주로 병원 측의 사후 대처가 미흡했다는 점이 지적됐다.
임신성 고혈압으로 사망한 경우에는 유족이 다수 승소(7건 중 5건)했다. 고혈압이나 단백뇨 등의 사전 징후가 있고, 이 증세가 중증으로 발전해 산모가 사망했다는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한 산모들: 모성사망 103건 아카이브 인터랙티브 기사도 읽어보세요. 산모가 출산 중 왜 사망했는지 객관적 상황들과 유족 13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이 클릭이 안 되면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 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pregnancy-g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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