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천민숙(65)씨가 말했다. 천씨는 평일 오전엔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퇴근 후엔 버스를 세 번 갈아타 경기 의정부시 딸네 집으로 간다. 편도 1시간 20분 거리를 주 5회 왕복하며, 두 살배기 손녀를 하루 6시간 이상 돌본다. 50대 중반부터 손주들을 본 천씨는 "60대가 되니 힘에 부쳐 입술도 막 부르튼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밤새 우는 손주 때문에 한숨도 못 자는 딸을 보면 내가 안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딸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경제 활동을 병행하지만, 그마저도 손주 보느라 일감을 줄였다. 천씨는 "지금은 여러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조일 만큼 조이고 산다"고 했다.
"엄마라는 자리는 참 어렵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천씨는 딸네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한민국 육아의 상당 부분이 이미 황혼에 접어든 '할마빠'(부모 대신 아이를 키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몫이다. 맞벌이에 정신 없는 자녀들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서다. 물론 손주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어여쁘지만, 그렇다고 고충이 없을 리 없다. 노후까지 챙기느라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할마빠들도 부쩍 늘고 있다.
7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조부모가 어린이집 등 기관 이용 시간 외에 손주를 돌보는 비율은 지난해 10.6%에 달했다. 급한 일이 있어 맡기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조부모 육아 비중은 30.7%까지 올라간다.
부모들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처럼, 조부모도 손주와 생계를 동시에 챙기는 경우가 많다. 두 살 손주를 키우려고 딸네 근처로 이사한 신현인(62)씨는 "아내에게만 맡길 수 없어 손주의 등·하원과 하원 후 돌보기를 나누고 있는데 따로 일까지 하다보니 루틴을 지키기 어려운 때가 많다"며 "손주가 열이 나 어린이집에라도 못 가는 날이면 일을 미뤄야 해서 난감하다"고 말했다.
체력 부담도 만만치 않다.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어린 손주들을 키우다 보니 손목, 어깨, 허리는 고장 나기 일쑤다. 윤정순(62)씨는 충남 천안시가 거주지이지만, 맞벌이 부부인 아들네 자녀를 보살피기 위해 주중엔 인천에서 산다. 그는 "아이들을 안아주다 보니 어깨가 아파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토로했다.
양육 과정에서 생기는 자녀와의 갈등도 문제다. 초등학생 손주를 둔 김영일(65)씨는 "정신 없이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종종 '하면 안 돼'와 같은 명령형을 쓴다"며 "이런 말투를 두고 딸과 입씨름을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사 방식을 두고 종종 딸과 다툰다는 한 60대도 "그럴 때마다 내가 여기 와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푸념했다.
아예 노후 대비를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 육아에 나선 이들도 있다. 김영일씨 역시 10년 전 식품 회사 일을 접고 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년퇴직까지 몇 년 더 남았지만 어린 손주를 돌봐줄 이가 마땅치 않아서다. 김씨는 "매시간 아이와 붙어 있어야 하니 일을 병행하기 쉽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마음이 편치 않아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조부모 육아'를 돕기 위해 일부 지자체에선 돌봄 수당을 지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혜자가 되기 위해선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9월부터 △만 24~36개월 이하 아이가 있는 △중위소득 150% 이하 가정에 대해 아이 1명당 3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지원 대상은 △맞벌이, 다자녀, 한부모 가정 등으로 한정되며 △조부모가 월 40시간 이상 보육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부분적인 지원에 더해 돌봄 정책의 근본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조부모가 나서야 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육아를 의지할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조부모들의 돌봄 노동은 보조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라며 "부모들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보육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시 "생애 주기상 노년기는 육아를 전담할 시기가 아니다"라며 "맞벌이 부부가 편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공공 돌봄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