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에 미쳐서 남편 이름까지 바꾸고...'선재 업고 튀어', 모두 놀란 흥행

입력
2024.05.06 04:30
15면
싸이월드·캔모아...2000년대 문화 곳곳에 
'우산 속 강동원'...'귀여니 소설' 감성 물씬
"'MSG워너비' 2000년대 복고 인기일 때 기획"
'K팝 팬 짝사랑' 얘기로 알려져 캐스팅 난항
각색으로 스타 배우·작가 없이 흥행 반전

결혼 2년 차에 접어든 직장인 이가영(35)씨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남편 이름을 최근 '선재'로 바꿨다. 선재는 tvN에서 지난달 처음 방송된 청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속 남자 주인공 이름으로 배우 변우석(32)이 연기한다. 선재에게 푹 빠진 그는 "저장된 남편 이름을 선재로 바꾸니 남편에게 전화 와도 화가 나지 않더라"라고 웃으며 말했다.


흥행 공식 깨고 '선친자' 등장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하는 한류 스타는 나오지 않는다. 유명 작가가 쓴 작품도 아니다. K콘텐츠 시장의 흥행 공식과는 거리가 먼 '선재 업고 튀어'가 요즘 인기다. 시청률은 4%대로 높지 않지만, 이씨처럼 '선친자'(선재에 미친 자)란 강력한 팬덤을 형성해 온라인에서 연일 화제다. tvN 관계자는 5일 "8회(4월 30일 방송) 기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선재 업고 튀어' 언급량이 2023년 하반기 이후 방송된 월화 드라마의 평균 대비 7배 높다"고 했다. '선재 업고 튀어'는 좋아하던 가수인 선재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살리려 과거로 간 솔(김혜윤)의 이야기다. 200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을 타면서 하이틴 로맨스의 주요 소비층인 10대를 넘어 30, 40대까지 불러 모으고 있다. 한국일보가 성·연령별 시청률을 조사해 보니, 8회의 여성 3040세대 시청률은 1회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선재~' 안에 '강동원' 있다

3040 시청자까지 몰린 배경엔 사회 전반에 뜨겁게 불고 있는 '복고 바람'이 있다. '선재 업고 튀어'는 2000년대 버전 '응답하라' 시리즈를 닮았다. 여주인공인 고등학생 솔은 식빵 리필이 가능한 생과일 전문점 '캔모아'에서 팥빙수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남학생의 '싸이월드'를 찾아가 일촌 신청을 한다. 2000년대 청년 문화 풍경이 드라마 곳곳에 재현된 것이다. 솔은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그 플레이리스트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브라운아이즈의 '점점', 김형중의 '그랬나 봐' 등으로 채워져 있다.




2000년대 신드롬급 인기였던 '귀여니 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와 캐릭터 설정도 3040 시청자를 추억으로 달아오르게 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드라마에선 비 오는 날 선재와 솔이 상대의 우산 속으로 번갈아 뛰어든다. 귀여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태성(강동원)이 한경(이청아)의 우산 속으로 우연히 뛰어들어 인연을 맺는, 그 유명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드라마에서 솔을 좋아하는 태성(송건희)의 이름은 '늑대의 유혹' 속 강동원이 연기한 배역의 이름과 같다. 복길 대중문화평론가는 "'선재 업고 튀어'는 2000년대 학교에 다닌 세대들이 공통으로 회상할 수 있는 매우 가까운 과거의 시대극"이라며 "추억의 장소인 '캔모아'에서 주인공이 '우유송'을 '현빈, 공유 싫어'란 식으로 패러디해 고백하고, '내가 니 별이다' 등 귀여니 소설에서 사용된 대사들을 차용하면서 소위 '2000년대 감성'을 깊은 애정으로 오마주해 과거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걸 인기 요인으로 꼽았다. 이 드라마 제작 관계자는 "'선재 업고 튀어'를 200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프로젝트 그룹 'MSG워너비'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때 기획했다"며 "3040 시청자를 아우르고 싶어 그 시절 문화적 코드를 드라마에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원작인 김빵 작가의 웹소설 '내일의 으뜸'과 달리 드라마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재가 수영 선수 출신이란 설정이 더해지면서 박태환이 한국 수영 선수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2008년(베이징 올림픽)으로 시기를 특정했다. 이 드라마엔 실제로 박태환이 등장한다.


변우석, 새 청춘 스타의 등장

'선재 업고 튀어'는 애초 K콘텐츠 시장의 기대작이 아니었다. 제작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K팝 팬의 짝사랑 얘기인 줄 알고 여러 남자 배우가 이 드라마 출연 제안을 고사했다. 남주인공 캐스팅에 난항을 겪을 때 변우석이 출연을 결정하면서 드라마 제작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변우석은 가수인 선재 역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 그가 드라마에서 밴드 이클립스 보컬을 맡아 부른 노래 '소나기'는 유명 가수들도 뚫기 어렵다는 음원 플랫폼 멜론 톱100(2일 기준)까지 진출했다. 극에서 선재는 "첫사랑인 솔을 떠올리며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곡을 썼다"고 말한다.


'장애 재현 윤리, 아이돌 자살' 이 시대 숙제도

원작에선 솔이 좋아하는 가수 선재를 살리기 위해 일방적으로 헌신하지만,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삶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쌍방 구원 서사'로 각색됐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지키려는 이야기로 확대되면서 드라마는 원작보다 더 폭넓게 시청자의 공감을 이끈다"며 "범죄 스릴러 요소가 부각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로맨스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국내에서도 반향을 낳은 대만 드라마 '상견니'의 흥행 요소도 엿보인다"고 평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솔은 과거로 돌아가 사고가 나기 전의 다치지 않은 다리로 선재를 죽음에서 구하려 한다. 솔의 장애는 원작엔 없는 설정이다. 이 변주가 구원의 극적인 효과를 부각해 드라마에 몰입을 이끌지만,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복길 대중문화평론가는 "'선재 업고 튀어'는 드라마 속 장애 재현 윤리와 우울증에 걸린 아이돌의 자살 등 K팝 산업의 문제 측면에서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을 함께 보여준다"고 봤다.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