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00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공항은 여행의 출발점이다. 공항이 들어선 섬을 흔히 영종도라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용유도와 합쳐진 섬이다.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는 대공사에도 용케 살아남은 주변 섬은 여행의 출발점이 아니라 목적지가 됐다. 인천공항 인근 무의도와 신시모도는 여전히 서해안 특유의 여유로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영종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무의도는 2019년 다리로 연결되며 비로소 차로 갈 수 있게 됐다. 인천공항을 개항하고 18년이 흐른 뒤였다. 위에서 아래로 섬을 종단하는 도로는 불과 6㎞ 남짓한데, 샛길로 빠지면 최첨단 시설의 인천공항과 대비되는 대자연이 펼쳐진다.
먼저 실미도유원지로 길을 잡았다. 실미도는 2003년 동명의 영화로 세상에 알려진 섬이다. 1971년 이 섬에서 훈련받던 북파공작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후 청와대로 향하다 자폭한 이른바 ‘실미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의문에 싸였던 사건의 진상은 2006년 7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남북 대결의 예기치 못한 비극을 감춘 섬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야영장으로 활용되는 솔숲을 지나면 해변에서 코앞에 보이는 실미도까지 하얀 바닷길이 열린다. 조개껍데기가 바삭바삭 밟히는 산책로 좌우에 관광객의 출입을 막기 위해 줄을 쳐 놓았다. 거북손이 다닥다닥 붙었고, 차진 갯벌에선 어민들이 한가로이 조개를 캐고 있다.
약 300m 바닷길을 걸어 실미도에 도착해도 당시의 비극을 알리는 단서는 없다. 고립사고를 피하기 위해 밀물 1시간 전에는 나가야 한다는 경고문과 고둥, 소라, 게 등 수산물을 함부로 채취하지 말라는 어촌계의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국가를 앞세운 야만의 세월은 결국 그렇게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물 빠진 해변을 한적하게 걸을 수 있지만, 숲이 우거진 섬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바로 아래 하나개해수욕장은 무의도에서 가장 큰 해변이다. 해변 중앙에 다소 조잡해 보이는 철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춤을 추는 여인과 호랑이 모습이다. 춤을 잘 추던 하늘나라 셋째 공주가 여차저차 이곳에 내려왔고 호랑이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데, 우아한 춤사위에 호랑이도 반하게 됐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무의도는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무희와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해수욕장을 찾았을 때는 마침 간조 시간, 아담한 모래사장 너머로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낮게깔린 해무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바다 끝까지 맨발의 행렬이 이어지고, 체험 도구를 빌린 일부 여행객도 부단히 갯벌을 누빈다.
한국의 서해갯벌은 캐나다와 미국 동부 연안, 아마존 유역, 유럽 북해 연안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평가받는다. 2021년 충남 서천과 전북 고창, 전남 신안과 보성·순천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지만, 서해에서도 가장 넓고 풍성하다는 이곳 영종갯벌은 제외됐다. 인천공항 건설로 상당한 갯벌이 사라졌고, 지금도 야금야금 땅을 넓히면서 생태적 가치가 위협받는 처지다.
하나개해수욕장에는 갯벌만큼이나 경이로운 풍광이 숨겨 있다. 해변 아래쪽에서 약 1㎞ 해상 덱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바깥은 드넓은 갯벌, 안쪽은 해안절벽이다. 물기가 번들거리는 회색빛 갯벌에 온갖 형상의 붉은 바위가 솟아 있다. 잘 배치한 조각공원 같기도 하고, 금강산을 축소해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사자, 원숭이, 불독, 햄버거 바위 등 갖가지 이름을 붙였지만 자연의 걸작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바닥에 해무라도 깔리면 영락없이 한 폭의 산수화다.
무의도 남쪽 끝에는 소무의도라는 딸린 섬이 있다. 해상교량으로 연결돼 있지만 관광객은 걸어서만 갈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섬에서 가장 높은 안산(해발 78m)을 거쳐 남동쪽 해안을 돌아오는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1시간을 잡으면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다. 장군바위, 명사의 해변, 몽여해변, 부처깨미 등의 명패를 단 명소도 섬만큼이나 아담하고 소박하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빼어난 풍광은 없지만 갯마을의 소소한 풍경이 정겹고 푸근하다.
육지와 새로 연결된 섬은 공통적으로 주차난을 겪는다. 무의도도 마찬가지다. 주차비(3,000원) 외에 별도의 입장료(인당 2,000원)를 받는 실미도유원지는 그나마 여유가 있지만, 하나개해수욕장 공영주차장과 소무의도 입구 마을 주차장은 평일에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주말에는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인천공항을 가운데 두고 무의도 반대편에는 신도, 시도, 모도와 장봉도 4개의 유인도가 열을 짓고있다. 이 중 신도 시도 모도는 연도교로 이어져 신시모도 삼형제섬이라 불린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신도선착장까지 하루 13회, 약 1시간 간격으로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어 접근이 편리하다. 배로 불과 10분이 걸린다.
신도선착장에서 모도 끝자락까지는 약 6㎞, 시간을 느긋하게 잡으면 걸어서도 가능하지만 구석구석 돌아보려면 전동바이크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선착장 인근에 두 곳의 자전거 대여점이 있는데, 실제 자전거는 2대뿐이고 전동바이크(2인용 1시간 2만 원)가 대부분이다.
신도는 고려 고종 때 삼별초가 근거지로 삼은 적이 있는데 이때 섬사람들이 순진하고 신의가 두터워 그리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는데 품질이 뛰어나 진짜 소금, ‘진염’이라고도 불렀다. 섬 동쪽 신도3리는 ‘벗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역시 소금 굽는 가마, 즉 벗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선착장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던 신도1리 포구 '진염나루'로 가자면 얕은 언덕을 하나 넘는다. 마을은 바다 건너 시도와 마주 보고 있는데, 바닷물이 흐르는 수로는 강처럼 폭이 좁다. 갯벌에 고인 바닷물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주민들이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운 갯골 너머로 의외의 높은 산이 보인다. 강화도 마니산이다.
화살 모양이어서 '살섬'으로 불리던 시도로 넘어간다. 북쪽 끝 수기해변에서 마니산이 가장 가깝게 보인다. 직선 거리 불과 5㎞다. 수기해변은 안쪽으로 아담하게 휘어져 산과 바다가 조화롭다. 일반인은 섬의 존재도 모르던 시기 ‘풀하우스(2004)’ ‘슬픈연가(2005)’ 등의 드라마를 찍었으니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그 아름다움을 알아본 곳이다. 지금도 숨겨진 것처럼 한적해 고운 모래밭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기 그만이다.
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방죽 안쪽에는 한반도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갈대가 무성하고, 벤치가 놓인 둑방에는 박태기가 화사하게 피어있다. 제방 끝에는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는 시도염전이 있다.
시도에서 모도로 가는 연도교를 넘으면 왼편 조그마한 바위섬에 힘차게 징검다리를 넘는 듯한 조형물이 보인다. 아담한 마을 앞에 제법 넓은 농지도 보인다. 쌀농사는 섬사람들의 오랜 꿈이었다. 과거 한 여학생이 청와대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1982년 섬을 방문한 당시 노태우 내무부 장관에게 주민들이 건의해 마침내 제방을 쌓고 마을 앞에 8ha의 논이 생겼다. 당시 쌓은 400m 제방은 해당화 꽃길로 가꾸고 있다.
제방이 끝나는 곳 일명 ‘박주기’ 바닷가에 ‘MODO’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박쥐 형상의 모도에서도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이 풍성한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에서 연결된 산책로로 해안 언덕을 넘으면 배미꾸미해변이 비밀의 공간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배의 밑구멍처럼 생긴 지형이라는 의미다.
모도는 근래에 ‘예술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해변에 이일호 작가의 조각품 수십 점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딱히 형체를 규정하기 힘든 초현실주의 작품이 다수인데, 그중에서도 해변 안쪽 바위에 선 나무 형상의 작품이 압권이다. 만조 때면 물이 밑동에서 찰랑거려 바다에 뿌리를 내린 듯 보인다. 작품의 실제 재료는 나무가 아닌 철이다. 열대 반얀트리처럼 치렁치렁 늘어진 가지가 묘하게 먼 나라로의 여행을 자극한다. 작품 위 하늘 위로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오른다.
신도선착장으로 돌아와 시간이 남으면 바로 옆 수변공원을 산책해도 좋다. 특히 마지막 배(오후 7시 30분)를 탈 시간이면 제방 안쪽 호수에 붉은 노을이 가득 번진다. 삼목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보니 신도와 영종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에 완공할 예정이라니 새우과자로 갈매기 희롱하며 떠나는 섬 여행의 낭만이 하나 사라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