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희망고문' 거창사건 특별법, 21대 국회서도 무산위기

입력
2024.04.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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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7대 국회부터 발의·폐기 반복
다음 달 29일까지 미처리 시 자동 폐기
유족 "불법 인정 유일 사건, 배상해야"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상 규정을 담은 ‘거창사건 배상 특별법’ 제정이 21대 국회에서도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16대 국회 때 정부가 재정 부담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 반송된 이후 발의와 폐기를 반복한 지 20년째다.

2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계류 중인 거창사건 관련 법안은 모두 5건이다. 사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정부 배상 근거를 담은 제정법 3건은 상임위 통과 후 법제사법위에 발목이 잡혀 있고, 합동위령제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개정법 2건은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이들 법안은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일인 다음 달 29일 전 처리되지 못하면 자동 폐기된다.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이 공비 토벌을 이유로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그해 12월 대구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위법행위가 인정됐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연대장 등은 1년도 안 돼 모두 풀려났고, 진상을 밝히는 작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1996년에야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됐으나 배상·보상 규정은 없었다. 2004년 유족 배상금 지급 등을 포함한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반송됐다. 거창사건에만 2,000억 원이 소요되고, 이를 선례로 비슷한 요구가 이어지면 최대 25조 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17∼20대 국회에서도 특별법은 꾸준히 발의됐지만 무산됐다. 2022년 대법원이 거창사건에 대해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으로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등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21대 국회 들어 관련 법안을 마지막으로 논의한 지난해 12월 14일 법안소위 회의록을 보면 법안의 취지나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이뤘으나 배상이냐 보상이냐 등 이행방안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배상금은 불법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갚는 것으로 통상 적법행위로 발생한 손실을 갚는 보상금보다 크다.

이성열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광주 5·18이나 제주 4·3, 여순사건 등 다른 유사사건과 달리 국가의 불법성이 재판으로 인정된 유일한 사건인데도 70년 넘게 제대로 된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희생자 배우자 등 유족 대부분이 고령인 만큼 반드시 다음 달 임시회에서 처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거창= 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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