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패권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과열되면서 세계 각국이 '디지털 무역 장벽' 쌓기에 한창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퇴출에 나섰고 일본 정부는 한국 네이버를 향해 라인야후 지분 매각을 압박 중이다. 데이터를 거머쥔 플랫폼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고 자국 이익 최우선주의를 내세워 다른 나라 플랫폼 옥죄기에 나선 것이다.
29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일본의 국민 메신저'로 통하는 라인(LINE)을 개발· 운영해온 네이버에 라인야후 사업자 지분을 소프트뱅크에 팔라고 압박하고 있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해 발생한 라인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책임을 물어 두 차례 행정 지도를 통해 라인야후에 네이버의 지분 정리를 요구했다. 이후 소프트뱅크가 라인야후의 중간 지주회사인 A홀딩스 주식을 네이버로부터 추가로 사들이기 위한 협의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커지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일 외교관계와 별개의 사안"이라면서도 "관련 동향을 주시하며 지원이 필요할 경우 제공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행정 지도가 사실상 네이버의 라인 경영권을 뺏기 위한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법정책센터장은 "라인야후 사고 원인인 사이버 보안 문제를 손보는 것이 아니라 모(母)기업의 지분을 팔라는 요구는 이례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내 IT 기업 관계자는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장기간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디지털전환(DX)을 추진 중인데 자국 테크 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면서 "앞서가는 테크 기업을 압박하는 사이에 자국 기업을 키우려는 계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는 한국(네이버·카카오), 미국(구글·메타), 중국(바이두·틱톡)과 같은 대규모 플랫폼이 없다.
최근 일본은 빅테크 규제에 맞춰 적극적으로 탈바꿈 중이다.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는 22일 구글의 독점금지법 위반 행위에 대해 첫 행정 처분을 내렸다. 구글이 '검색 연동형 광고' 기술을 라인야후에 제공한다고 약속해 놓고 라인야후의 디지털 광고 기술을 제한한 혐의다.
일본 공정위는 '스마트폰경쟁촉진법안'도 마련 중이다. 테크 기업이 △앱스토어 등에서 다른 기업의 참여를 방해하는 행위 △스마트폰 구입 시 처음 설치된 앱 삭제를 어렵게 만드는 행위 △검색에서 자사 서비스를 우선 표시하는 행위 등을 하면 일본 내 매출액의 20%를 과징금으로 물리는 내용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전 세계적으로 자국 우선주의, 보호 무역주의 흐름이 뚜렷해지면서 일본 정부가 그 위에 적극적으로 올라탄 것"이라며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첨단 산업일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될 것"이라고 봤다.
미국의 '틱톡 밀어내기'는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틱톡을 강제 매각하는 내용의 '틱톡금지법'에 서명하며 입법을 마무리했다. 틱톡의 모기업인 중국기업 바이트댄스는 270일 안에 미국 내 사업권을 팔아야 한다. 매각 기한은 대통령이 1회에 한해 90일 연장 가능하다. 기간 내 매각하지 않으면 미국 내 틱톡 서비스는 금지된다. 다만 바이트댄스는 소송을 통해 법안의 위헌 여부를 다투겠다고 예고했다.
틱톡금지법은 미국인 사용자들의 개인 정보가 중국 기업인 틱톡을 통해 중국 정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출발했다. 틱톡이 선례가 되면 알리·테무·쉬인 등 중국 애플리케이션(앱)도 미국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25일 중국 통신사의 미국 내 인터넷 서비스까지 사실상 금지했다.
디지털 무역 전쟁은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않는다. 유럽연합(EU)은 3월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를 콕 집어 강력하게 규제하는 디지털시장법(DMA)을 시행하고 있다. 빅테크가 다른 기업의 경쟁을 제한하고 자사 서비스를 우대한 사실이 증명되면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연간 매출액의 10%까지 과징금으로 물릴 예정이다. 미국의 우방인 캐나다도 미국 빅테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17일 캐나다 의회가 디지털서비스 세금 도입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법안은 구글과 메타 등에 적용되는 만큼 미국 정부의 반발이 거세 캐나다 의회에서 지난해부터 계류 중이었다.
세계 각국은 타국의 플랫폼 규제를 강화하는 이유로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 보호를 내세운다. 데이터 중심의 디지털 경제가 세계 경제의 뉴노멀(새로운 기준)이 된 만큼 국가 차원에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데이터의 생성·저장·유통·활용까지 모든 과정을 관리하겠다는 것. 디지털 무역장벽 쌓기에 가장 먼저 나섰던 중국은 2017년 사이버보안법 등을 통해 해외 플랫폼의 데이터 서버를 반드시 중국 내에 두도록 했다.
한국의 상황은 독특하다.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 같은 자국 플랫폼을 보유한 나라가 많지 않아서다. 미국 기업이 글로벌 플랫폼 경제의 75%(가트너 집계)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 사이에선 한국 정부 정책 방향성이 모호하다는 우려가 많다.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들이 실제보다 적은 매출액을 신고해 턱없이 적은 법인세를 내고 망 구축 비용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적절한 규제가 없다는 불만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했던 '플랫폼 공정 경쟁 촉진법'은 해외 플랫폼에 유리한 법이라는 비판에 좌초됐으나 총선이라는 국가적 정치 이벤트가 마무리된 만큼 다시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공공 클라우드 시장에선 글로벌 클라우드서비스 기업에 빗장을 풀어주는 사안도 검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빅테크로부터 국내 플랫폼 산업을 보호하면서 외교적 관계도 고려하는 고도의 데이터 주권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는 국내에선 빅테크의 독점 행위에 대한 규제를 점검하면서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국내 빅테크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 센터장은 "신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무엇이 글로벌 스탠더드인지가 애매모호해진 건 사실"이라면서도 "자국 기업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정부가 액션을 취하지 않는 건 역할을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