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3월 강제징용 피해배상금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며 한일관계 복원을 주도했지만 역사의식을 둘러싼 일본의 행태는 바뀌지 않고 있다. 우익 사관 교과서 검정, 군마현 조선인강제동원 추도비 철거 등 뻔뻔함만 보여주는 실정이다. 지난 23일에는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국가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 신사에 기시다 내각의 주요 장관과 의원들이 잇따라 참배했다.
□ 일본의 퇴행은 일상화된 듯 보인다. 우리 정부도 기시다 총리가 야스쿠니에 공물을 봉납한 21일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한다”는 외교부 대변인 논평만 냈을 뿐이다. 오랜 ‘정면돌파’ 전략이 이미 먹혀든 게 아닌지 씁쓸하다. 야스쿠니가 외교 문제로 비화한 건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총리가 패전 40주년을 맞아 각료들을 대동하고 총리 자격으로 참배하면서다. 한국과 중국 등의 격렬한 반대로 공식 참배는 한 차례로 끝났다. 그러다 2001년 4월 고이즈미 총리가 등장하면서 2006년 9월 물러날 때까지 매년 참배했다. 이 기간 중일정상회담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2013년 아베 총리가 또 한 번 참배한다.
□ 일본인의 역사관은 국제사회 인식과 많이 다르다. 필자가 도쿄 근무 당시 접한 상당수가 전범처리를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1946·도쿄재판)을 승자인 미국에 의한 일방적·편파적 결과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침략전쟁은커녕 일본의 자존을 위해 피할 수 없었다는 ‘대동아전쟁사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본질로 들어가면 야스쿠니 참배가 국내 문제냐, 국제 문제냐로 이어진다.
□ 고이즈미는 “마음의 문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느 나라나 전몰자에 대한 추도의 마음이 있고, 어떻게 추도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묘한 말로 둘러대지만 국내 정치적 요소가 더 크다고 본다. 주변국 압력에 굴하지 않는 자세가 내부 지지로 이어지는 구조 때문이다. 국제사회 리더 국가가 되려면 마지막 벽은 보편적 가치나 인류의 미래상에 대해 신념 등을 제시하는 일이다. 일본이 번번이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를 야스쿠니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