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80초. 배우 김갑수(67)가 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2010)에 등장한 뒤 죽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드라마 '60일, 지정 생존자'(2019)에선 첫 회에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그는 '단명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출연작에서 주로 죽음으로 중도에 하차했으나 강렬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에게 시청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김갑수는 요즘 신드롬급 인기인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도 도중에 죽었다. 재벌기업 퀸즈그룹을 세운 홍만대 회장 역을 맡은 그는 휠체어에 앉아 엷은 웃음을 지은 뒤 지난 14일 방송(12화)에서 생을 마감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동거인 모슬희(이미숙)에게 배신당해 그룹 경영권을 모조리 뺏긴 뒤였다.
"대본을 받고 '어려서 구두닦이를 하며 혼자 사업을 일군 홍 회장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를 고민했어요.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 뒤 인생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고, 어떤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까' 싶어 허무한 듯 웃으며 죽는 장면을 찍었죠." 27일 종방을 앞두고 서울 강남구 소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김갑수의 말이다.
'사망 연기 전문 배우'로 입소문이 난 김갑수에겐 별의별 '사망 배역' 제안이 들어온다. 그는 드라마 '아이리스' 시즌1(2009)과 시즌2(2013)에서 두 번 죽었다. 시즌1에서 핵물리학자 유정훈 역을 맡아 사망한 뒤 시즌2에서 그의 형으로 나와 또 죽었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죽는 배역 출연을 결정할까. "출연 분량은 신경 쓰지 않아요.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임팩트죠. 인물의 죽음이 그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를 보죠." '눈물의 여왕'에서 봉 회장은 "내가 잘못 살았다는 고백을 유산으로 남긴다"며 "너희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란다"란 유언을 남기고 떠난다. 그가 남긴 말은 '눈물의 여왕'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또다시 중도에 사망하는 배역으로 '눈물의 여왕' 출연을 결정한 이유다.
"'죽는 캐릭터가 하도 많이 들어오니 (배우로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싶다가 한편으론 '오래 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그런데 죽음이란 게 탄생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하잖아요.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죽는 배역이 들어올 때)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극 '태조왕건'(2000~2001)을 할 땐 처음엔 70회에서 죽기로 돼 있다가 150회에 가서 죽었어요. 시청자들이 캐릭터(종간)를 사랑하니 분량이 늘어난 거죠. '눈물의 여왕'에서도 7회에 죽기로 돼 있었는데 12회에서 죽었네요, 하하하."
반복되는 죽음으로 되레 존재감을 발휘하는 김갑수의 연기 여정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영화 '태백산맥'(1994)에서 난폭한 악역 염상구를 열연한 뒤 액션 장르 출연 제안이 잇따를 때 그는 두 번째 작품으로 '금홍아 금홍아'(1995)에서 세상을 냉소하는, 병색이 짙은 시인 이상 역을 택했다. 노희경 작가가 대본을 쓴 드라마 '슬픈 유혹'(1999)에선 동성애 연기도 했다. 1977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해 연기를 시작한 그는 대학로에서 노력파로 유명했다. 롤모델로 여겼던 이순재와 신구, 박근형이 연기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보고 싶어 그들이 출연하는 연극에 스태프로 지원했다.
결혼식도 대학로 극장에서 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그는 50대 문턱에 들어서 정신적으로 휘청였다. 연기가 버거워 한 장면을 찍고 나면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이걸(연기) 더 할 수 있을까?"란 고민을 씻겨준 건 결국 세월이었다. 환갑을 훌쩍 넘어선 그는 요즘 "(촬영) 현장에선 즐겁게"란 마음가짐으로 일터에 나간다. 그는 '눈물의 여왕' 분위기 메이커였다. "(김)수현이가 어쩌다 대사를 틀리면 '역할이 버겁니'라고 농담을 해요. 수현이도 그렇고 주위에서 후배들이랑 스태프들이 배꼽 잡고 웃죠. 다들 촬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든요. 예민하고요. 할 땐 하더라도 재미있게 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일 오래 못하거든요."
카메라 밖에선 웃음을 잃지 않는 김갑수는 요즘 전자 기타를 배운다. 따로 유튜브 채널도 만들 예정이다. "또래들에겐 '창피해하지 말자'고 하고 싶어요. 가령 키오스크 사용이 서툰 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젊었을 땐 없었던 물건이고 시스템이었으니까요. 배우는 재미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