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배우자의 부패 스캔들이 스페인 정국을 흔들고 있다. 현지 사법당국이 중도 좌파 여당을 이끌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의 부인에게 제기된 권한 남용 부패 의혹 조사에 착수하면서다. 산체스 총리는 의혹을 부인하면서도 사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등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24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입장문을 내고 "(사법당국의 조사는) 나를 정치적으로 무너뜨리려는 공격"이라면서도 "정부를 계속 이끌어야 할지, 아니면 이 명예(총리직)를 버려야 할지 결정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는 거취를 고민한 뒤 오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산체스 총리의 부인 베고냐 고메스는 2022년까지 4년간 대학 산하 연구기관 임원으로 재직할 당시 항공사 에어유로파와 모기업인 글로벌리아로부터 각종 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에어유로파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시기였던 2020년 말 정부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고메스가 총리 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앞서 극우 성향 단체 '마노스 림피아스(깨끗한 손)'가 이 사건을 고소했고, 마드리드법원은 전날 예비조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산체스 총리는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조사에 협조하겠다면서도 의혹 자체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공직자 이해 충돌 감시 기구가 이미 한 차례 이 혐의를 기각했음에도 야당인 국민당(PP)과 극우정당 복스(Vox) 등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고발된 것은 불법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나의 아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18년 총리 자리에 오른 산체스 총리는 지난해 5월 지방선거에서 자신이 이끌던 사회노동당(PSOE)이 참패하자 의회를 해산하고 7월 조기 총선을 치렀다. 하지만 여기서도 국민당에 의석수가 밀렸다. 그러자 산체스 총리는 '캐스팅 보트(승패 결정 투표권)'를 쥐게 된 카탈루냐 분리주의 정당들에 손을 내밀어 소수 연정을 구성, 진통 끝에 연임에 성공했다.
이때 그가 연정의 대가로 소수 정당들에 카탈루냐 분리독립 운동에 연루된 수천 명의 사면을 약속한 것이 지역감정에 불을 붙였다. 나머지 스페인 지역에선 '카탈루냐 독립을 부추기는 결정'이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정치적 승부수였지만 역풍도 만만찮았던 셈이다. 산체스 총리가 약속한 분리주의자 사면 법안은 지난달 178표 대 172표로 하원을 통과했지만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향후 산체스 총리의 결단에 따라 스페인 정국은 다시 혼돈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실제 사임할 경우 새 총리를 뽑아야 하지만, 여야 모두 단독으로 과반을 장담하기 어려운 현재 의회 구도 때문에 조기 총선이 열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저명한 진보 지도자의 정치적 미래가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의심에 빠져들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