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월, 패션 디자이너 도나 캐런(Donna Karen)이 백악관 새 주인이 된 빌 클린턴에게 “미국 최고의 재단사”라며 한 남자를 소개했다. 뉴욕 브루클린의 고급 수제 수트 브랜드 ‘마틴 그린필드 클로시어스(Martin Greenfield Clothiers)’를 운영하며, 캐런의 DKNY와 브룩스브라더스, 랙앤본 등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최고급 정장 라인을 도맡아 제작해 온 만 65세의 마틴 그린필드(Martin Greenfield)였다.
옷 한두 벌이 아니라 아예 ‘대통령의 옷장(presidential wardrobe)’을 주문 받은 그린필드는 '고객'의 취향을 알기 위해 먼저 그의 옷장을 보고 싶다고 청했다. 그린필드는 2014년 회고록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내 눈을 믿기 힘들었다. 짧은 가죽 재킷 몇 벌과 과도하게 많은 조깅복, 고만고만한 기성복 수트 몇 벌에 당장 내다 버리고 싶을 만큼 낡은 외투….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이게 정말 대통령의 옷장입니까?’”
아칸소 빈민가에서 성장해 명문대를 나와 정치인이 된 뒤로도 대체로 검소하게 산 정치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주지사까지 지낸 연방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연미복(tuxedo) 한 벌이 없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아마도 백악관 역사상 ‘가장 애처로운(most pathetic)’ 대통령의 옷장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클린턴은 평생 풀드레스 턱시도를 입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고, 그린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연미복 입는 법, 나비넥타이 매는 법부터 모든 걸 가르쳐드리죠.”
그는 약 30분 간 클린턴의 몸 치수 27곳을 쟀다.
“정장 한 벌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치수가 필요한 줄 몰랐어요.”
“지금까지 입으신 정장이라면 그렇죠. 제 수트를 입어 보시면 그 차이를 직접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과 가족은 경호와 의료보험 등 각종 특전을 누리지만, 냉장고와 옷장은 자비로 채워야 한다. 유명 디자이너나 외교 관계에서 옷을 선물 받더라도 한 번 착용 후 전자는 기부해야 하고 후자는 국립기록보관소에 넘겨야 한다. 임기 말 클린턴의 옷장엔 제 돈으로 구입한 그린필드의 수트만 스무 벌 넘게 걸려 있었다.
그린필드의 첫 대통령 고객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아이젠하워는 근 40년 간 입던 군복을 갓 벗은 1950년 무렵 뉴욕의 유서 깊은 맞춤정장업체 ‘‘GGG 양복점(GGG Clothings)’ 재단사 그린필드를 만났고 이후 평생 그의 단골이 됐다.
56년 어느 날 아이젠하워는 새 양복 호주머니에서 그린필드가 남긴 쪽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수에즈에 군인과 무기 대신) 달러를 보내시면 어떤가요?” 수에즈 위기, 즉 이집트 민족주의 지도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비밀 군사협정을 맺고 전쟁(제2차 중동전쟁)을 준비하던 일촉즉발의 시기였다. 쪽지는 중동사태를 평화적·외교적으로 풀어 달라는 청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일개 재단사’의 대담한 요청을 백악관 기자단에게 들려줘 웃음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는 나치 멸절수용소 생존자인 그린필드에게 평화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둘은 45년 4월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유대인 수감자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만 17세의 그린필드는 운 좋게 아이젠하워와 악수까지 나눴다. 회고록에 그는 “내 눈에 아이젠하워는 키가 10피트는 돼 보였다”고 썼다. 훗날 재단사로 실측한 고객의 키는 5피트 10인치(177.8cm)였다.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6명의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과 연예계-스포츠계 명사들의 정장을 지은, 2009년 남성잡지 GQ 선정 ‘미국의 가장 위대한 살아 있는 재단사’ 마틴 그린필드가 별세했다. 향년 95세.
그린필드는 체코슬로바키아 남동부 파블로보(Pavlovo, 현 우크라이나)에서 1928년 태어났다. 산업 공학자 아버지의 벌이가 좋아 그와 2녀1남 동생들의 삶도 비교적 유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39년 나치 침공으로 상황은 돌변했다. 그는 부모 뜻에 따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친척집으로 보내졌지만 친척들이 자신을 짐스러워하자 가출, 유곽의 여인들에게 얹혀 지내며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일을 배웠다. 41년 만 13세가 된 그는 유대인 성년식(bar mitzvah)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며칠 뒤 조부모와 부모, 여동생 둘과 갓 네 살된 남동생까지 온 가족이 폴란드의 한 게토를 거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와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수감 직후 아마도 가스실로 끌려갔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여동생 하나는 별도로 분류됐다가, 그의 추정으론 악명 높은 나치 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인체실험 대상이 됐다.
부자도 이내 생이별했다. 그린필드는 아버지가 나치 군인들에게 그를 “뛰어난 기술자”라고 호소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쓸모 있는 기술이 있으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걸 그는 수용소에서 배웠다.
그린필드는 세탁실에서 나치 장교와 병사들의 옷을 빨고 다림질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친위대(SS) 장교의 셔츠를 빨다가 실수로 옷깃을 찢었다고 한다. 그를 심하게 매질한 장교는 망가진 셔츠를 그에게 집어 던졌고, 그는 한 수감자에게 바느질을 배워 그 옷을 제 몸에 맞게 수선한 뒤 줄무늬 수감자복 안에 껴입었다. 어린 수감자의 튀는 옷차림이 흥미로웠던지 병사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날 이후 병사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나를 조금 유별난, 아무렇게나 죽여도 괜찮은 이들과는 다른 사람인 듯 대했다.” 그는 자서전에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다. 셔츠에 그런 힘이 있었다”고 썼다.
수용소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지옥의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며 버틴 사연을 자전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썼다. 정신의학자였던 프랭클은 마치 자신이 강의를 준비하는 교수인 양 자신과 동료 수감자들의 일상과 내면을 분석하며 현실과 거리를 유지했다. 요네하라 마리가 실화 소설 ’올가의 반어법’에서 주목한 체코 여성 올가 모리소브나와 스탈린 수용소 수감자들에게는 그들끼리 나눈 이야기가 힘이 됐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오스트리아 화가 프리들 디커브랜다이스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즉 아름다움으로 견뎠다고 한다.
그린필드에겐 그 셔츠가 어쩌면 그런 것이었다. 추레한 죄수복과 달리 제 몸에 맞춰 수선한, 아마도 나치 디자이너 휴고 보스가 고급 원단으로 디자인했을 그 셔츠의 단정한 감촉에서 인간적인 무언가를 느꼈을지 모른다. 그에게 셔츠는 살인적인 추위를 덜어 준 여분의 옷을 넘어 개성과 품위, 존엄의 표식이었다. 44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이감돼 탄약공장 노동자로 부려질 때에도, 미군이 수용소를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그 셔츠를 겹쳐 입고 있었다.
독일인 저널리스트 하랄트 얘너는 패전 후 하루아침에 붕괴한 나치 이념의 진공상태에서, 또 극한의 궁핍과 굶주림 속에서 각자 생존의지만 남은 독일 시민들이 어떻게 늑대 같은 무리로 돌변했는지를 ‘늑대의 시간’이란 논픽션에 기록했다. 범죄와 타락, 타자에 대한 배척과 폭력, 모든 책임을 히틀러 일당에게 떠넘기며 진정한 속죄를 회피-부정하던 기만적 반성의 정조.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린필드가 맞닥뜨린 현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혼자였다. 소련이 모든 사유재산을 수용해 버린 고향에도 남은 게 없었다. 최소한의 배급 식량과 약탈-도둑질로 어렵사리 버티며 혹시 생존한 가족을 찾아다니던 그는 아버지마저 종전 직전 총살 당한 사실을 알게 된 뒤 47년 9월 미국의 먼 친척을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본명 막시밀리언 그륀펠트(Maximilian Grünfeld)를 버리고 영어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인 소개로 당시 명품 양복점으로 이름난 뉴욕 브루클린 ‘GGG 양복점’의 심부름꾼(floor boy)’이 된 그는 틈틈이 익힌 재단 기술과 재능, 열정을 인정 받아 불과 2년 만에 재단사가 됐고, 아이젠하워와 극적으로 재회했다. 아이젠하워의 주선 덕에 정가 거물 고객들을 차례로 얻게 된 그는 의류산업을 포함한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77년 양복점을 인수, 고집스레 기존의 수제 방식을 고수하며 버텼다.
옷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원단 등 재료 일체를 국내에서 조달해 전통 방식으로 짓는 그의 드문 고집은 옷의 태와 별개로 값진 것이었다. 린든 존슨, 제럴드 포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 조 바이든이 마치 백악관 전통처럼 그에게 옷을 주문했다. 무척 까다로운 패션 감각을 지녔다는 오바마는 취임 직후 자신이 입던 양복을 그린필드에게 보내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린필드는 “나는 다른 사람 옷을 복제하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결국 오바마도 그에게 치수를 쟀다. 그린필드는 “2011년 2월 이후 오바마가 입은 거의 모든 정장이 우리 옷이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대통령의 색’이라 불리는 차콜이나 짙은 네이비 정장에서 파격적으로 탈피해 화제가 된 오바마의 2014년 황갈색 수트도 그의 것이었다.
“30년 넘게 PX에서만 사 입고(…) 검은색 넥타이만 매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에게 “유니폼을 갈아 입히"고 "넥타이 색상이 카메라와 다투게 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친 것도 그린필드였다. 파월은 정계에 입문하던 80년대 그린필드를 만나 평생 자신의 “멘토 중 한 명”으로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고 국무장관 시절 차관보였던 리처드 아미티지와 훗날 장관이 된 도널드 럼즈펠드를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파월이 어느 날 타임지 화보 촬영을 위해 아이들과 야외에서 축구를 해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낡은 블레이저를 입었던 파월은 얼마 뒤 그린필드의 퉁명스러운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린필드는 “그 잡지 사진 봤어요? 사람들은 그 수트도 내가 만든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배우 폴 뉴먼과 덴젤 워싱턴,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와 마이클 잭슨, 그 세대 사이의 수많은 연예계 스타들,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 '마피아의 회계사' 마이어 랜스키,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 카멜로 앤서니도 등이 그의 고객이었다. 1920년대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HBO사 드라마 시리즈 ‘보드워크 엠파이어(Boardwalk Empire, 2010~14)의 배우 173명의 정장 600여 벌을 비롯,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와 ‘월스트리트의 늑대(2013)’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출연진의 양복도 그(의 회사)가 공급했다. 2019년 영화 ‘조커(Joker)의 호아킨 피닉스가 입은 오렌지색 조끼와 붉은 수트도 그의 작품이었다. ‘보드워크 엠파이어’ 촬영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자리에서 배우 스티브 부세미(Steve Buscemi)가 그를 껴안으며 “내가 이렇게 멋져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 일을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 “그린필드의 수제 양복은 뉴욕에서 어떤 지위의 은밀한 상징 같은 위상을 차지했다”고 썼고, 패션 칼럼니스트 제이콥 갤러거(Jacob Gallagher)는 “남성 정장에 입문한 사람, 수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린필드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일종의 신화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그린필드가 자신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건 80년대 말 워싱턴D.C 홀로코스트 기념관 공사가 시작되던 무렵부터였다. 유대인 공동체 등이 기념관을 채울 물증과 증언 즉 ‘쇼아(Shoah)’의 기록을 모으던 때였다. 2014년 ‘배너티 페어’ 인터뷰에서 그는 “약 40년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내 과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 많은 고객들이 내 팔순 잔치(2008년)에 와서 내가 난민이자 생존자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결국 치르지 못했던 1941년 성인식을 겸한 파티였다.
44년 말, 부헨발트 시절 그는 미군 폭격에 파괴된 나치 시장 관사 정리-청소 작업에 차출된 적이 있었다. 건물 잔해를 정리하던 그는 관사 한 켠의 토끼장에서 시든 상추와 당근 부스러기를 주워 먹다 시장 부인에게 들켜 나치 병사에게 무자비하게 맞았다. 종전 후 그는 친구와 함께 기관총을 구해 자기를 고자질한 그 여성을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던 그를 본 뒤 복수를 포기했다. 그는 “그 순간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저널리스트 겸 작가 윈턴 홀(Wynton Hall)의 도움을 받아 2014년 출간한 회고록 제목도 ‘인간의 척도(Measure of a Man): 아우슈비츠 생존자에서 대통령의 재단사로’였다.
“나치 수용소에서 첫 재단 수업을 받은 게 이상적인 견습 과정은 아니었다. 영국 셰빌로나 밀라노였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수용소에서의 그 순간(셔츠 에피소드)이 내 남은 인생의 시작이었다.(…) 신은 놀라운 유머감각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56년 결혼한 아내 알린 버겐(Arlene Bergen)과 이제는 회사를 물려받은 아들 둘을 낳고 해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