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재건축 바람 버텨낸 단층 주거단지
"서울에 이런 곳이"... 리모델링 결심한 건축주
'마당 있는 마을' 분위기 맞춰 증축 대신 마당 선택
지하-다락으로 '젊은 부부' 라이프스타일 반영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 잡은 '교수단지'는 주택의 시간이 응축된 마을이다. 1960년대 서울대 교직원들이 땅을 사서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 후반까지 크고 작은 단독주택이 자리 잡았다. 2008년 이후 재건축 바람이 몰아쳤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수년간 논란을 거듭하다 조합 설립이 취소됐다. 우여곡절 끝에 남은 단층 주거지엔 지금도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박성수(37) 박선영(29) 부부가 반려견 '콘치'와 사는 1층 주택(대지면적 195㎡, 연면적 113.93㎡)이다.
4년 전 도심의 좁은 오피스텔을 벗어나 혼자 살 주택을 찾던 성수씨는 누나의 권유로 이 마을을 찾았다. "처음 왔던 때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을 거예요. 담장을 따라 골목길을 걷는데 잘 가꿔놓은 푸릇푸릇한 마당이 보였어요. 서울에 이런 별천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살고 싶은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부동산중개인에게 소개받은 아담한 집을 둘러보고 곧장 매매를 결심했다. 박공지붕과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집은 온화한 동네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원래 모습이 잘 유지돼 있었어요. 서울에 이런 집이 또 있을까 싶었죠. 조금만 손보면 근사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성수씨는 그 길로 평소에 선망하던 정수진(SIE 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를 찾아가 레노베이션을 부탁했다. 젊은 건축주의 부탁으로 집을 찾은 건축가도 좋은 인상을 받기는 마찬가지. 잘 가꿔진 꽃길과 정원이 있는 동네다운 동네, 처음 자리에 소담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단층 주택에서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정감을 느꼈다. 정 소장은 "동네의 정취를 보존하기에 마땅했고 그러자면 집의 형식을 유지해야 했다"며 "외관에선 동네와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자연스럽게 입히는 것이 과제였다"고 말했다.
교수단지의 특징은 크건 작건 집집마다 마당이 있다는 것이다. 마당은 각 주택의 얼굴이자 마을을 지탱하는 정서적 구심점이랄까. 실제 이 마을 주민들은 정성껏 가꾼 정원을 함께 감상하기 위해 매년 봄이면 이틀 동안 자신의 집 대문을 활짝 연다. 수년 전 재건축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주축이 돼 시작한 '마을 가꾸기 운동'인데 지금도 '교수단지 정원 축제'라는 이름으로 이어가는 중이다.
성수씨의 집에도 작지만 수목을 가꾸기에 충분한 마당이 있었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정원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당의 면적과 형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자연을 느끼며 쉬어가는 마당을 둔다는 건 단독주택이니까 가능한 얘기예요. 증축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마당을 확보하기 위해 지하 공간을 줄이고 출입구까지 옮겼죠. 마당에 많은 걸 내준 집이에요."
콘크리트를 걷어내 만든 잔디 마당은 집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공간이 됐다. 건축주는 아직 정원을 완성하진 못했다고 했다. "나무와 꽃, 가구가 제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예요. 서두르고 싶진 않아요. 마당을 매만지면서 찬찬히 누리는 재미가 있거든요."
집 뒤편에 자리하는 옥상 테라스는 또 하나의 마당. 원래 있던 다락에는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지만 과감하게 통창을 설치하고 테라스 공간을 연결했다. 앞마당이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적 마당이라면 뒤편에 만든 옥상 테라스는 집주인에게만 허락된 사적 마당인 셈이다. 한강 뷰처럼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오래된 주택지와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풍경을 조망하는 나름의 운치가 있다고. 성수씨는 "마당 있는 집에 살다 보니 늘 외부에 눈이 가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발길이 향한다"며 "내부 면적을 포기하면서 야외 공간을 만든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벽돌과 비슷한 벽돌 타일을 써서 과거 스타일을 고수한 외관과 달리 내부 공간에는 많은 변화를 줬다. 건축가는 우선 설계 당시 미혼 직장인이었던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해 벽을 터 개방감을 극대화하고 심플한 스타일을 입혔다. "요리를 즐기는 건축주의 취미를 고려해 부엌 층고를 높이고 넓은 면적을 부엌에 할애했어요. 남성 혼자 사는 집이니 주방 가구나 싱크대에 짙은 녹색, 회색처럼 일반 가정집에서 잘 쓰지 않는 짙은 색상을 더했죠."
동시에 맥시멀리스트인 건축주가 소장한 살림을 수납할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정 소장은 넘치는 피규어와 옷을 보관할 수납장을 만들기 위해 집 가운데 벽을 만들고 수납장을 짜 넣었다. 공간 한가운데 벽과 계단이 들어선 독특한 평면이다. 부엌과 거실의 맞은편에는 침실과 드레스룸, 욕실이 나란히 배치됐다. "집 중앙에 계단실과 함께 벽을 만들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으로 이등분했다"며 "벽을 사이에 두고 순환하는 동선을 만들면 영역을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와 다락을 손보는 건 과거 흔적을 발견하고 잇는 과정이었다. 오래된 주택을 뜯다 보면 노후 정도에 따라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철거하면서 발견된 구멍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어둡고 축축하던 지하 공간은 미디어실로 탈바꿈하고 창고로 쓰던 다락은 층고가 20㎝ 올라가 어엿한 생활공간으로 바뀌었다. 성수씨는 "위아래 숨은 공간을 찾아내면서 단층 집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었다"며 "정교한 작품처럼 라이프스타일과 딱 맞아떨어진 공간"이라고 말했다.
오래된 새집이 주는 힘일까. 건축주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의미심장한 시작을 연달아 경험하고 있다. 집을 짓고 나서 얼마 안 돼 선영씨를 만나 연인이 됐고, 올해 초 결혼했다. 그리하여 성수씨 혼자 누리던 싱글하우스는 3개월 전 신혼집으로 변신했고, 연말쯤 태어날 아기의 생애 첫 집이 될 예정이다. "이 집이 인생의 좋은 전환점이 돼줬어요. 구성원이 늘면서 공간을 바꿔가는데 그 또한 큰 재미예요. 제 놀이터였던 다락은 그림 작업을 하는 아내의 아틀리에가 됐고 온전히 혼자 쓰던 취미방과 수납공간들도 이제 곧 육아용품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움직이면서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집으로 완성되고 있어요. 살아가면서 집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