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만난 김서경(22)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먼저 알게 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이날 헌재에서 열린 특별한 공개 변론을 가능하게 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후 단체 청소년기후행동(청기행) 상임활동가다.
이날 헌재 공개변론은 평소와는 달랐다. 탄핵심판, 사형제 존치, 검수완박, 존엄사 등 무겁고 딱딱한 주제들이 지금까지의 주제였다면, 이날 공개변론의 테마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기후'였다. 아시아권에서는 처음 열린 기후 관련 헌법재판인데, 시민단체와 청소년·어린이 등이 이 헌법소원을 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30년까지 2018년 배출량 대비 40%로 줄이기로 한 탄소중립기본법과 그 시행령, 국가기본계획 등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이 부족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게 청구의 취지다. 김씨와 다른 활동가들이 고교생이던 2019년 주도한 '기후파업 시위'로부터 시작된 소송이다.
언론이 '아시아 최초'를 강조하면서 헌재의 공개변론까지 이끈 청춘들의 '당찬 패기'에 주목했지만, 김씨는 하루 24시간, 365일을 환경운동에 매진하는 ‘투사’로 살아온 건 아니라고 했다. “저희는 '평범하다'는 게 가장 큰 정체성이거든요. 기후위기가 평범한 사람들조차 어쩔 수 없이 피해받는 당사자로 내모는 만큼, 기후 운동 역시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거죠." 그는 특별한 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기후 운동에 발을 들인 것도,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굳이 꼽자면 호기심. “초·중·고 내내 기후변화가 문제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는 말은 매번 나오는데 뭐가 문제인 건지 궁금했는데, 비슷한 고민을 하는 10대들이 모인다는 거예요. 그게 시작이었죠.”
방과 후 저녁시간이나 주말에 시간을 내 화상회의를 틀고 다 함께 공부했고, 이는 자연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으로 이어지며 기후단체 청기행의 토대가 됐다. 기후 위기의 현실을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김씨의 목표가 됐다. ‘기후변화’ 대신 ‘기후 위기’라는 말을 일상화한 것도 청기행이다. 청소년이 주축이 된 단체지만 지난 4년간 ‘미래 세대’라는 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현재진행형인 기후 위기의 절박성을 한 단계 낮추고, 기후 문제를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할 위험이 있어서다.
6차에 걸친 의견서, 110건에 달하는 증거서류를 통해 그렇게도 원했던 헌재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헌법소원 제기 4년 만에 열린 공개변론을 방청석에서 지켜본 김씨는 정작 담담했다. 4시간 30분가량 이어진 긴 변론에 그는 “헌법재판관들의 상세한 질문에서 기후에 대한 헌재의 관심이 보여서 놀랐다”며 웃었다. 그간 서면으로만 받아봤던 정부 측의 주장을 직접 들어볼 수 있던 경험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날 공개변론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소송을 낸 활동가와 시민뿐 아니라, 소송 상대방인 정부, 이를 판정해 줄 헌재까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후 문제의 심각성을 통감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이다.
김씨와 활동가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성취의 '공'을 자기들끼리만 나누지 않기로 했다. 청기행 등은 공개변론에 제출하는 전문가 의견서 외에, 성별·세대를 막론한 일반 시민들로부터 국민참여 의견서를 받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단 걸 보여줘서 전문가,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장 겪는 이야기임을 알리고 싶어요.” '아시아 최초'라는 특별한 일을 해낸 그들이 특별한 대접을 포기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