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제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인 것 같습니다.”
1997년 데뷔 이래 사랑에 대한 앨범을 처음 만들었다면서 자우림의 멤버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김윤아가 꺼낸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새 앨범 ‘관능소설’의 첫 곡인 ‘카멜리아’는 심지어 ‘사랑, 내 사랑, 눈꽃 아름답게 흩날리고’ ‘그대여, 그대여, 그대 품 안의 나는 만개하네’라고 노래하는 꽤 낭만적인 곡이다. 22일 서울 강남구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 앨범에 수록된 ‘장밋빛 인생’의 가사로 설명을 대신했다.
“’마지막이 없다면 그 무엇이 아름다우리 / 사랑은 마지막 장면에 완성되리’라고 가사를 썼어요. 인생도 사랑도 마지막이 있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존재할 수 없듯이 죽음, 마지막이 사랑과 인생을 완성시키니까요.”
‘영원한 사랑 따윈 없다’고 노래하던 자우림의 3년 전 앨범과 연결되는 맥락이다. 김윤아의 ‘낙관적 패배주의’와도 맞닿는다. “결국 우린 모두 죽으니까 인생과의 싸움에 한 명도 이길 수 없잖아요.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 살아 있는 동안 춤추고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는 게 제 오랜 생각이에요. 자우림 음악의 기저이기도 합니다.”
김윤아가 기억하는 ‘죽음에 대한 첫 경험’은 유치원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씨를 먹으면 죽는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홍시를 먹다 씨를 삼킨 뒤 ‘나는 곧 죽겠구나’라 생각하며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초등학생 때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을 지켜본 이래 10대 시절 겪은 친척의 연이은 죽음은 낙관적 패배주의의 씨앗이 됐다. “어릴 땐 죽는 게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다 그냥 없어지는구나 생각했죠. 현실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니, 현실이 가장 두려우니, 사라지는 게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이후로 늘 죽음이 체화된 채 살았던 듯해요.”
김윤아는 유독 사랑 노래에 거부 반응이 있다고 했다. “’너를 사랑하니 떠나줄게’라는 식의 사랑 노래나 발라드는 부르기도 힘들고 쓰기도 힘들다”고. 대신 앨범에는 자신만의 사랑 노래, 인생 이야기를 10편의 단편 소설, 단편 영화 만들듯 써보기로 했다. 고전 영화나 뮤지컬 같은 앨범의 분위기에 맞게 재즈, 탱고, 포크, 클래식 등의 색채를 녹여 냈다.
솔로 4집 ‘타인의 고통’ 이후 8년 만에 발표한 새 앨범의 제목은 ‘관능’이 주는 예스러운 느낌과 불순한 뉘앙스를 유머러스하게 뒤집어 사용한 것이다. 3집 ‘315360’(2010)을 만들며 다음 앨범은 사랑 노래로 채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14년 만에 완성한 앨범. 그사이 김윤아는 50대에 접어들었다.
20년 가까이 함께 지낸 남편과 고교생인 아들을 두고 새로운 사랑에 뛰어들 순 없는 노릇, 그래서 그는 뇌를 속이기로 했다. 영화 ‘데미지’ ‘화양연화’ ‘색, 계’ ‘헤어질 결심’ 등을 보고 또 보며 실체 없는 연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엔 거의 실연당한 상태가 됐어요. 단지 뇌를 속인 것뿐인데도 어떤 경계선과 몇 차례 마주했어요. 그 선을 넘으면 광기에 빠질 수도 있겠다 싶었죠. 제겐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아요.”
앨범 곡들은 양면적이다. ‘행복을 바라는 게 잘못인가요’라고 절절하게 외치기도 하고, ‘좋은 남자는 많아도 / 나를 미치게 하는 건 / 체취 좋은 남자’라며 성적 취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동네의 ‘평범한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오랜 ‘남사친’인 'U'와 이야기하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털어놓는다. “늘 결혼 이후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며 동료 여성들에게 바친 ‘해피엔딩’ 같은 곡도 있다. 애절하게 비극적이다가 발랄하게 일상을 이야기하는, 김윤아다운 모순적 구성이다.
김윤아는 가상 연애가 주는 도파민과 음악 작업이 주는 도파민에 취해 있다가 이제 막 벗어났다면서 “기쁨을 주는 호르몬에 가득 차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벗어나니 기분이 좀 그렇다”면서 “콘서트를 하며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콘서트는 앨범이 나오는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김윤아의 다음 목표는 트로트로 앨범을 채워보는 것이다. 이 역시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냈던 숙제이기도 하다. 그는 “아직 내공이 차지 않아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면서 “다음 앨범에선 아직 무리이지 않을까 싶은데 언젠가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저만의 트로트를 노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