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전 찍은 결혼 사진이 놓여 있는 부부의 거실. 친구들을 초대해 아내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던 남편은 술에 취하자 돌변해 아내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급기야 팔을 휘저으며 아내를 물리적으로 위협했고, 친구들이 남편을 떼어내며 말렸지만 폭언은 계속됐다. JTBC가 이달 초 새로 내놓은 예능 프로그램 ‘이혼숙려캠프-새로고침’ 방송의 일부다.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게 제작진이 밝힌 기획 의도이지만, 비(非)연예인 부부들의 '싸움 중계'와 배우자 문제 행동에 대한 '폭로'가 반복됐다.
#. MBN도 이달부터 예능 프로그램 '한번쯤 이혼할 결심'을 정규 편성할 예정이다. 갈등을 겪는 유명인 부부들이 가상으로 이혼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으로, 지난 1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송됐다가 자리를 잡게 됐다. 하지만 당시 전직 축구선수 정대세의 10세 아들이 부모가 따로 살게됐다는 소식을 듣고 “슬프다”며 혼란스러워해 아동 학대 논란이 일었다. 가상 이혼이라는 설정을 미성년 자녀들에게까지 과도하게 적용한 탓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혼 예능’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TV조선이 2020년 이혼 부부들의 재회를 담은 ‘우리 이혼했어요’로 이혼을 처음 예능 소재로 삼은 것이 사실상 시초다. SBS플러스는 ‘당신의 결혼은 안녕하십니까'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은 ‘결혼과 이혼 사이'를 방송했고, MBC는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을 방송 중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이혼 위기에 직면한 부부들의 갈등을 상세히 다룬 후 전문가들의 조언 등을 들은 부부가 마지막에 결혼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MBN과 JTBC도 이 토대 위에 약간의 설정만 바꿔 ‘이혼 예능’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혼 예능이 늘어나는 것은 ‘가성비’(비용 대비 효과) 때문이다. 연애, 결혼, 이혼 등 ‘치정’ 관련 방송은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게 들지만 높은 시청률을 보장한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주로 드라마에서 치정 소재를 활용했다”며 “리얼리티 예능이라는 신세계가 열리고 가족·남녀관계 관찰 예능이 유행한 뒤로는 '솔루션(해법) 제시’ 등을 명목으로 치정 이슈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활용한다”고 말했다. TV 시청자는 다른 미디어 시청자보다 평균 연령이 높은 만큼 연애·결혼보다 이혼 소재가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점도 종합편성채널들이 이혼 예능에 손을 대는 이유다.
‘기획 의도'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이혼 예능의 미덕도 적지 않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얼굴을 공개하며 나왔다”고 고백하는 출연자들은 부부관계 회복과 치유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른 부부들의 갈등 사례를 참고하고, 부부상담 전문가·변호사의 조언을 청취하고, 이혼 경험이 있는 MC들의 진솔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듣는 것은 시청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간접체험이 된다. 또 이혼이 '실패'가 아닌 '또 하나의 선택'이자 '삶의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 전환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혼 예능의 현실은 '부부싸움 사례모음집'에 가깝다. 배우자의 폭언, 폭행, 불륜 의심, 외도, 각종 중독, 경제력, 생활습관 등 갖가지 이유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이 싸우는 모습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 집요하다 싶을 만큼 반복한다. 의료진이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진단한 중증 알코올 중독 출연자를 입원시키려 애쓰는 대신 촬영을 지속한다. 자극적이고 가벼운 접근으로 배우자 한쪽을 쉽게 악마화하거나 희화화하는 것도 문제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는 “전반적으로는 이혼의 이유가 복합적인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혼 예능이 늘면서 자극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부부가 얼마나 엉망인지, 어쩌다 현재의 지경까지 이르렀는지만 보여주다가 프로그램의 당초 목적인 치유와 솔루션은 마지막에 황급히 진행되는 패턴도 반복된다. "다시 노력해보겠다"는 부부의 다짐과 함께 프로그램이 서둘러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혼 예능이 과연 부부들에게는 치유를, 시청자에게는 지혜를 줬는지 갸우뚱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랑과 이혼 사이'에 출연했던 그룹 티아라 출신 아름 부부 등 일부 커플은 방송 후 배우자의 폭행 등 중대 사유로 이혼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제작진이 되새겨야 할 것은 '출연자들과의 거리'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소위 ‘분량 확보’를 위해 상황을 연출해 억지로 갈등을 만드는 대신 전개가 조금 느리더라도 부부들을 찬찬히 따라가며 깊고 전문적인 솔루션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방송을 활용하려는 ‘출연자의 연출’ 또한 잘 걸러야 한다. 정덕현 평론가는 "제작진이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며 "그래야 리얼리티가 살아나고 시청자들에게 간접 체험의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