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을 앞두고 양측이 22일로 예고한 실무회동이 전격 무산됐다. 대통령실이 정무수석 교체를 이유로 불과 3시간여 전에 일정을 취소하면서다. 회담에 올릴 의제를 주고받으며 공통분모를 찾는 탐색전부터 꼬인 셈이다.
이에 민주당은 "이게 정치냐"며 강한 유감을 밝혔다. 다만 양측 모두 어렵사리 마련된 대화의 장을 걷어찰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민주당은 용산의 '무례함'을 부각해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할 태세다. 양측은 일단 23일 실무회동을 갖고 영수회담 동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양측은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서로 장외 메시지를 던지며 회담 분위기를 띄우는 데 주력했다. 이 대표가 먼저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회담은 민생을 살리고 정치를 복원하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며 "국민을 위한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주저해서도 안 된다"며 윤 대통령의 국정 기조 전환을 촉구했다.
윤 대통령도 화답했다. 신임 비서실장에 정진석 의원을 기용하는 인선을 직접 발표하며 "이 대표 이야기를 많이 듣겠다", "야당과의 관계를 더 살피고 설득과 소통에 주력하겠다"고 연신 자세를 낮췄다. "대통령이 달라지려 애를 쓰는 것 같다"(민주당 관계자)는 기대가 나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협치를 다짐한 윤 대통령의 스텝은 곧장 엉켰다. 비서실장에 이어 정무수석까지 홍철호 전 의원으로 교체하면서 당초 실무회동에 대통령실을 대리해 참석하려던 한오섭 정무수석의 역할이 애매해졌다.
이에 민주당은 오후 3시 회동 시간에 맞춰 "대통령실이 일방적으로 회동을 취소했다. 총선 민심을 받드는 중요한 회담을 준비하는 회동인데, 미숙하게 처리한 것에 유감을 표한다"고 언론에 공지했다. 침묵하던 대통령실은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교체가 임박한 정무수석이 대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보고, 점심시간 직전인 오전 11시 45분 미리 회동 연기를 요청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고 해명했다.
이후에도 발언이 엇갈려 양측의 신경전은 고조됐다. 홍철호 신임 정무수석은 "반나절 차이는 큰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오늘 바로 연락드려 내일 만나 뵙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천준호 당대표 비서실장은 "아직 연락받은 게 없다"고 일축했다. 민주당에선 "대통령이 말하는 정치가 이것이냐", "영수회담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날 선 반응이 쏟아졌다.
다만 이를 두고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샅바싸움이란 해석이 나왔다. 민주당 복수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홍철호 신임 정무수석과 천준호 비서실장이 내일(23일) 만나기로 한 것으로 안다. 장소는 그대로 용산 대통령실이고 시간은 미정"이라고 전했다.
실무회동 불씨가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나면서, 시간상으로는 촉박하지만 영수회담이 이번주에 성사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대표가 23일과 26일 대장동·선거법 재판으로 발이 묶인 상태라 사실상 24, 25일이 유력하다.
민주당은 실무회동에서 모든 패를 다 드러내 협상력을 최대한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윤 대통령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김건희 특검법은 제외하고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 지원금'과 '채 상병 특검법' 등 각종 현안을 테이블에 올리는 것이다.
다만 회담 성과에 대해서는 기대치를 낮추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과의 입장차가 워낙 현격해서다. 이에 전 국민 지원금과 의정 갈등을 논의할 테이블로 '민생 및 의정 협의체' 출범 카드를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선방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통령은 야당에 손을 내밀었다는 '명분'을 챙기고, 이 대표는 민생 현안 주도권을 틀어쥐는 '실리'를 챙기며 윈윈하는 구도다.
박근혜 정부 시절 민주당 원내대표 자격으로 대통령과 회동 경험이 있는 우상호 의원은 "영수회담은 디테일보다는 대원칙에 집중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손을 먼저 내민 만큼 야당에 선물을 주면서 다음을 기약하면 그것만으로도 빈손 회담을 면할 것"이라고 조언했다.